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일보와 나]<26>김병익 문학평론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일보와 나]<26>김병익 문학평론가

입력
2004.07.22 00:00
0 0

50년대의 후반 대학시절부터 보기 시작한 한국일보는 다른 신문보다 사력(社歷)이 짧아서 받은 인상이기도 했겠지만, 내가 즐겨보는 문화면이 어떤 신문보다 젊고 참신했다. 신문들이 정치·사회에 대한 보도로 압도되고 문화면도 대체로 지루한 외부 기고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일보 문화면은 신선한 연성(軟性) 기사도 많았고 무엇보다 해외문화 소개에 활발했다. 해방 이후 최초의 본격적인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홍성유 선생의 '비극은 없다'와 그에 이은 김용성씨의 '잃은 자와 찾은 자'를 그래서 더 공감하며 읽었다.이렇게 독자로서 시작된 한국일보와의 사귐은 50년 가까이 계속되면서 60년대 중반에 창간된 '주간한국'으로 확대되었다. 김성우 선생의 편집으로 우리 주간지문화시대를 열어간 이 잡지의 독창적인 기획 아이디어며, 위트에 찬 제목으로 나는 역시 '젊은 신문'이란 생각을 거듭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즈음의 나도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어서 이 신문과 잡지의 생동하는 아이디어와 문체에 부러움에 젖곤 했다.

일간지 아닌 '주간한국'이었지만 내가 그 취재대상이 되기도 한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김현 김치수 김주연과 함께 낸 '현대한국문학의 이론'이 이 주간지의 두 면에 큼직한 기사로 보도되었는데, 지금의 교보빌딩 뒷골목에서 찍은 네 저자 사진에 붙인 "이 근시(近視)의 젊은 문학비평가들이..." 운운의 위트어린 캡션에 감탄했다.

이후 이런저런 일에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기도 하며, 한국일보사가 주관하는 팔봉문학비평상의 심사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수상을 하기도 하는 등의 관계를 꾸준히 맺어왔지만 지금도 내게 따뜻하게 기억되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 1976년의 아마도 봄에 받은 원고 청탁이었다.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인 이영희 선생이 전화를 걸어와 "신문에 테마에세이 연재를 시작했는데 어떤 주제든 자유롭게 골라 열 댓 장 길이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한국기자협회장으로 일하다가 흉흉한 시국의 어지러움 속에 남산에 끌려갔다가 풀려나면서 회장직은 물론, 신문기자직에서도 쫓겨나 궁리 끝에 친구들과 막 문학과지성사(문지)를 창사하여 발행인을 아내 이름으로 하며 작업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일보는 유산체제의 정치적 상황으로 기피되고 있던 내게 처음으로 신문 원고 청탁을 해준 것이다. 내가 창업기의 바쁜 틈에도 이 청탁을 수락한 것은, '과연 내 이름의 글이 신문에 실릴 수 있을까' 보고 싶기도 했고, 또 그런 상황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정에 대하여'란 주제를 선택했고, 그 글에서 권력으로부터 협박 당하고 쫓겨나고 소외된 사람들이 끼리끼리 숨은 격려와 후원을 주고 받는 '연대'를 짚어내어 그에 대한 감사와 찬사를 보냈다. 그 글은 "그들과의 우정을 위해서 나는 심야총서를 만들어볼까"로 끝났다.

빙 둘러 쓴, 그것도 '우정'이란 후덕한 얼굴을 써서인지 글은 아무런 문제없이 한국일보에 게재되었고, 몇몇 친구들은 그 '우정'과 '심야총서'의 숨은 의미를 알아보고 우정어린 격려를 보내왔다. 그 우의는 그러나 내가 한국일보에 보내야 할 것임을 그 후의 긴 세월을 회상하면서 더욱 확인하게 되었다. 그 춥고 외로운 시절에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고, 내 존재증명을 보여주도록 한 그 우정에 답례를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