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88년 10월. 교도소 재소자들이 호송버스에서 집단 탈출, 8일 동안 강도행각을 벌이며 서울 도심을 휘저은 사건이 발생했다. 주범 지강헌 등은 경찰의 추적에 몰려 인질극을 벌이던 서울 남가좌동의 한 주택에서 최후를 맞았다. 마지막 순간 지강헌은 현장 중계되는 TV 카메라 앞에서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마구 쏟아낸 뒤 스스로의 머리에 권총을 쏘았다. 그가 내뱉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졸지에 유행어가 됐고, 그가 마지막으로 들려달라고 했던 노래 '홀리데이'에는 비장미까지 얹혀져 세월을 건너 뛴 인기곡으로 부활했다.■ 6년 뒤 가을에는 '지존파 사건'으로 세상이 또 한번 발칵 뒤집어졌다. 외진 곳에 살인공장까지 차린 범인들은 무고한 사업가 부부 등 5명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희생자의 인육까지 씹었다. 그리고는 "돈 많은 자를 저주하고 불공평한 사회에 복수하고자 했다"면서 "어머니를 죽이지 못한 게 한"이라는 극언까지 해댔다. 이번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 유영철도 "이 일을 계기로 부유층도 각성했으면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외국의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들이 이렇게 거창한 사회적 명분을 내세웠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 범죄가 시대적 병리현상을 반영한다는 지적은 맞다. 그렇더라도 그건 사회정책적으로 감당해야 할 문제다. 흉악범이 입에 담는 순간 그건 비겁한 핑계가 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핑계는 정신적 자기방어기제인 투사(投射)의 한 형태다. 성공은 제 능력(내적귀인·內的歸因)으로 여기는 대신, 실패는 환경 탓(외적귀인·外的歸因)으로 돌리는 그것이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 그대로 잘못의 가장 큰 원인이 자신인데도 이를 인정치 않고 외부에서 이유를 찾아 자신을 변명하는 심리 방식이다.
■ 한국인이 특히 핑계를 잘 댄다는 연구는 꽤 있고, 그게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전통적 혈연문화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와있다. 이번에 더욱 기가 찬 일은 많은 네티즌들까지 "부자와 창녀만 죽였는데 왜 그를 악인으로 모느냐"며 사회적 핑계를 들어 연쇄살인범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주로 재미와 반향을 좇는 그들만의 문화를 이해한다 해도 이런 인식의 확산은 무책임하고도 위험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문제가 터졌다 하면 늘 다른 곳에서 핑계를 찾으려 드는 이가 범죄자나 철없는 일부 네티즌 뿐만이 아닌 것 같아 그게 더 걱정스럽긴 하지만.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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