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 해 창간된 한국일보를 구독하기 시작했으니 올해가 꼭 50년째다.한 음식점의 단골이 되면 꼭 그 집만 가야 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내가 50년 동안 한국일보만을 고집한 것은 한국일보가 주는 재미와 즐거움 때문이었다. 청년시절 나의 가장 큰 관심은 연재소설이었다. '삼국지' '임진왜란' '절망 뒤에 오는 것' '벽오동 심은 뜻은' '최후의 증언' '임상옥' '심청' 등은 빼놓지 않고 읽었다. 매일 소설을 읽으며 다음날자에 실릴 내용을 기대하던 그 때의 설렘과 즐거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외국 연재만화 '블론디'도 참 재미있었는데, 미국에 가지 않고도 미국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디더스 사장은 직원들의 월급을 올려주지 않는 자린고비지만 회사에 출근해 낮잠이나 자고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대그우드를 파면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일보는 지면내용도 충실하고 다양했지만 유익한 캠페인과 행사가 많은 신문이었다. 나 역시 기회가 되면 적극 참가했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65년 '농촌돕기 포플러 조림운동'이다. 1계좌 1만원을 한국일보에 보내면 자기 고향에 포플러나무 300그루를 운송해 심어주고 재배하는 방법까지 지도해 줬다. 마을 녹화에 많은 공헌을 한 캠페인이었다. 대학을 나와 환일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도 1계좌를 만들고 당시 쌀 세 가마 값이었던 1만원을 기탁했다. 그 덕에 1965년 1월24일자엔 내 사진과 이름이 신문의 기탁자 명단에 게재됐다. 동료 교사가 이를 보고 신기해 하며 "좋은 일에 참여하고 있다"며 칭찬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몇 년 후 고향(충남 강경)에 가보니 포플러가 마을 주위에 가득했고, 이웃 마을에서도 옮겨다 심었다.
'모교에 도서보내기 운동'도 참 유익한 캠페인이었다. 1구좌 5만원을 내면 원하는 도서를 사서 보내주는 것인데 나는 2계좌 10만원을 기탁하고 내가 졸업한 전북 익산시 함라초등학교에 33권짜리 역사서적을 보냈다. 현상퀴즈에 응모해 받은 조그만 전자시계는 15년이 지났지만 아직 잘 작동하고 있다. 강연할 때 교탁 위에 놓고 보면 좋아서 지금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는 한국일보의 '거북이 마라톤 대회'에도 틈만 나면 참가해 건강을 관리해 오고 있다.
한국일보를 읽으면서 나는 독특한 신문 독법(讀法)을 만들었다. 신문을 버리지 않고 6개월 또는 1년간 모아 두었다가 방학 때를 이용해 한꺼번에 읽는 것이다. 내가 역사를 전공한 탓도 있겠지만, 신문기사를 두었다 읽어보면 역사적 가치가 더해지는 느낌이다. 또 이렇게 하면 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원인과 경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어 대화를 하거나 강의할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매우 유리하다. 지금도 내 서재엔 올 3월부터 최근까지의 한국일보가 날자대로 정리돼 있다. 물론 이번 여름에 읽을 것이다.
50년간 서울에 살면서 한국일보와 함께 지낸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교사로서 37년, 산돌교회 평신도로 38년, 백운대를 오른 지 50년, 그리고 한국일보 애독자로서 50년, 이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 내 삶의 표어는 '심신이 건강하게, 멋있게 살자'이다. 이러한 삶에 한국일보가 늘 함께 있었다.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질 한국일보를 앞으로도 지켜보고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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