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 파이팅!” 가녀린 목소리들이 강원 춘천초등학교 체조훈련장을 휘돌아 감는다. 출발선에 선 박경아(18ㆍ강원체고)가 흰 가루를 듬뿍 바르고 침까지 뱉은 뒤 숨을 고르더니 도마를 향해 달린다.“더 빨리!” 남권호 코치의 구령이 끝나기도 전에 도마를 딛고 허공에서 한바퀴 휙 돈다. 착지 땐 무릎을 구부리고 만다. ‘아, 불안하다.’ 본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한마디를 내뱉았다. “실수만 안 하면 좋으련만…”
비가 우악스럽게 쏟아지던 16일 오후 경아는 춘천초등학교 체조훈련장에서 21일 시작하는 문화관광부장관기 전국체조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앙증맞은 유니폼을 입은 초등학교 꼬마 선수들은 경아의 진지한 훈련은 아랑곳 않고 빗자루를 칼로 삼아 장난에 한창이다.
‘낭랑 18세’ 경아는 한국 여자 기계체조 선수론 유일하게 아테네를 밟는다. 지난해 8월 세계선수권에서 개인종합65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지만 용케 국제체조연맹(FIG)은 올해 1월 박경아를 콕 집어 여자 개인전 출전자로 통보해왔다.
세계 요정들이 저마다 예쁜 자태를 뽐내는 꿈의 무대에서 세계 65위가 언감생심 메달을 바란다는 건 지나친 과욕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왕 출전하는 마당에 “메달을 따도록 노력하겠다”는 당찬 출사표쯤은 곱게 봐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는 한사코 마다한다. “평생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올림픽에 나가는 것만 해도 자랑스러워요.”
메달 가능성이 없다고 자타가 생각하는 탓일까. 엄연히 국가대표인 데도 그는 서울의 태릉선수촌이 아닌 춘천, 그것도 제 학교가 아닌 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하루하루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경아는 눈시울만 붉혔다. “속상해요. 제가 실력이 없으니까….”
경아를 가르치는 강원체고 남권호 코치는 “명색이 국가대표인 데 자리가 없다고 선수촌 입촌도 안 해주고 아테네에도 (코치 없이)선수 혼자가라는 게 말이 됩니까? 메달이 유력한 남자체조에 집중하는 건 좋지만 이러니까 한국 여자체조가 제자리걸음커녕 뒷걸음질 치는 거아니겠어요”라며 불편을 꺼냈다.
남 코치의 말처럼 한국 여자기계체조는 ‘암흑의 10년’을 보냈다. 86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개를 따며 약진한 여자체조는 그 후 바르셀로나올림픽(92)부터 줄곧 올림픽 단체전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시드니올림픽에도 개인전에서 한 명이 명맥을 유지했다.
세계무대에서야 명함 내밀기도 쑥스럽지만 경아는 국내에서 알아주는 선수다. 춘천여중 3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돼 2002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아깝게도 개인종합, 단체종합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쳤다. 지난해엔 아시아선수권에서 한국이 종합3위를 얻는데 앞장섰다.
올해엔 박상미 이현주 신나리 등 동료 후배들과 함께 KBS배 전국체조대회에서 강원체고가 4년 만에 전국을 제패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보통 7, 8명으로 꾸려지는 여자체조 단체전을 달랑 4명이서 소화한 셈이다. 더구나 강원도엔 춘천초교 체조훈련장이 유일한데 그 열악한 훈련 환경을 딛고 이룬 소중한 승리였다.
21일 열리는 전국체조대회가 코앞이라 올림픽 나간다고 학교 팀 훈련을 제쳐두고 따로 훈련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래도 “남들이 못 누린 행운을 얻었다”먀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다고 했다. 50㎏이던 몸무게를 7㎏이나 줄여 보기좋게 만들고 하체강화훈련과 균형감각훈련을 실시했다.
자신 있는 평균대 고난도기술도 연마 중이다. “이제 80점쯤 될까요. 실수만 안 하면 될 것 같은데 생각만큼 안돼요.” 남 코치는 “각 종목이 원활히 연결되도록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체조요정이었던 나디아 코마네치의 태릉선수촌 방문 일정(23일)을 알렸다. “정말이요?"면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만나러 와”라고 했더니 오히려 시큰둥하다. “태릉에서 훈련도 안 하는데…, 나이가 많아서 싫어요. 전 장난(중국ㆍ부산아시안게임 체조 4관왕)이 좋아요.”
하긴 훈련도 하지 않는 태릉선수촌에 코마네치의 방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아쉬운 듯 경아는 “음… 만나면 어떻게 연습했는지 꼭 묻고 싶다”고 했다. “메달은 못 따도 좋으니 각오 한마디는 들려 주어야 지요.” 그는 머뭇거리더니 띄엄띄엄 한참 이야기를 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했거든요.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실력은 늘지 않고 비전은 없어 보이고…, 아마 후배들도 그런 고민과 맞닥뜨릴 때가 올거에요. 그때, 그니까 그 순간, 제 올림픽 출전이 그들에게 작은 희망이 됐으면 해요. ‘묵묵히 열심히 하면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있구나’ 하는….”
경아가 자신의 실력없음을 탓해야 할까? 그는 10년 가까이 오로지 기계체조에만 매달려 있다.
/춘천=고찬유기자 jutdae@hk.co.kr
● 박경아 프로필
생년월일 1986. 7. 21
출생지 강원 춘천시
키 153㎝
몸무게 43.5㎏
혈액형 A형
가족 1남1녀 중 둘째
취미 가요(보아) 듣기, 드라마(파리의 연인 등) 보기
학력 춘천초-춘천여중-강원체고 3년
경력
1999 전국소년체육대회 개인종합 1위
2000 KBS배 전국체조대회 개인종합 1위
2001 문화관광부장관기전국시도체조대회 개인종합 1위
2002 문화관광부장관기전국시도체조대회 평균대 1위
2002 부산아시안게임 단체종합, 개인종합 4위
2003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65위, 단체종합 21위
2003 아시아선수권 단체종합 3위
2004 KBS배 전국체조대회 단체종합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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