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참으로 민망하고 안쓰러운 장면을 목격할 때가 많다. 잠시 주차한 차에 앞 유리에 꽂혀 있는 ‘팔도 과부 항시 대기’라는 유흥업소 홍보전단, 신장개업한 후미진 음식점 앞에 나붙은 만국기, 웬만한 갈비집 마당에서 빙빙 도는 물레방아….홀로 된 여인을 폄하하는 그들의 뻔뻔함과, 세계 각국이 자신을 축하해줄 거라는 빈한한 상상력, 그리고 ‘목가적 풍경은 역시 물레방아가 최고’라는 틀에 박힌 정서가 몹시 견디기 힘들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온갖 유치하고 천박하며 조악한 미완성 예술품을 뜻하는 ‘키치(Kitch)’적 발상과 감수성이 눈에 걸린다.
23일 개봉하는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주인공 정다빈과 송승헌은 아무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가 첫눈 내린 공원에서 1년여 만에 만났다. 그것도 멀리 고색창연한 중세의 성을 배경으로. 잊을 만하면 또다시 이 장면을 수차례 보여주는 이 영화는 게으른 것인가, 아니면 키치문화의 열성 팬인가.
같은 날 개봉하는 ‘늑대의 유혹’도 자유롭지가 않다. 배다른 형제와 툭 하면 사랑에 빠지는 그 위대한 TV 미니시리즈의 전통을 반복하니, 극중 남자주인공(조한선 강동원) 중 한 명과 여주인공 이청아가 그 덫에 걸리고 만다.
이밖에 지난달 개봉한 외화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은 진짜 덴마크 왕자를 만난 신데렐라 여대생의 이야기이고, 공포영화 ‘페이스’는 소복 입고 산발 머리를 한 귀신 이야기이며, 일본영화 ‘소녀 검객 아즈미 대혈전’은 미니스커트 입은 소녀의 칼 싸움 이야기였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 삶은 또 얼마나 키치적인가. 책꽂이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칸트와 정약용의 두꺼운 철학서적, 휴일 저녁 할인매장 카트에 가득 실린 온갖 식료품과 생활용품…. 읽지도 않는 책에서 고상한 삶의 포만감을, 잔뜩 실은 물건에서 유복한 중산층의 삶을 확인하고픈 게 아닌가.
그래서 길거리에서 파는 인형은 언제나 귀엽고, 결혼식장의 외양은 언제나 중세 유럽의 성 모양이다. 이런 우리 앞에 영화 주인공이 설사 백혈병으로 죽는다 해도 그게 무슨 지탄받을 일인가.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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