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쿨하거나 풋풋한 신파극이란 없다. 신파극의 정서는 대개 장마철 시골여관의 이불만큼이나 퀴퀴하고 눅눅하기 마련이다. 이복남매의 사랑이든, 삼각관계든 신파극은 가리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라도 관객의 눈물을 한 바가지쯤 쏟게 하면 그것으로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신파극이다.김태균 감독의 ‘늑대의 유혹’은 이런 선입견을 보기좋게 무너뜨리는 영화다. 이복남매의 넘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전형적인 신파극 구조를 답습했으면서도, 극중 주인공들의 삶은 이상하게 풋풋하고 향기롭다.
남녀가 얽히고 설킨 뻔한 삼각관계인데도, 그 사랑이란게 더럽지도, 치사하지도 않다. 오히려 극장 문을 나온 후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의 삶이 더욱 구질구질하고 쓰라릴 뿐이다.
캐릭터와 배우들 덕분인가. 싸움 잘하는 학교 짱 반해원(조한선)이 자신이 점찍은 여학생 정한경(이청아)에게 나름대로 서툴지만 진솔한 사랑고백을 한다. “나 어떡하냐. 너 좋아하나 보다!” 반해원 만큼이나 한 주먹 하는 정태성(강동원)도 그녀에게 말한다. “우리 이렇게 만나게 해준 하늘, 저주하고 원망할 거야”라고.
그러나 이는 해답이 아니다. 조한선의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 강동원의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터프한 매력이 대단하지만, 이같은 대사와 캐릭터는 숱한 학원만화와 TV드라마에서 이미 질리도록 봐 왔다.
그렇다면 감독의 연출력 덕분일까. 학원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무협 ‘화산고’로 강한 인상을 남긴 김태균 감독이 작정하고 만든 ‘슬픈 영화’라서? 그래서 간간히 나오는 두 ‘수컷’의 액션대결이 비장감 넘치고 형식미 가득해서?
이것 역시 이 영화의 장점이기는 하지만, 정답은 아닐 터. 비 오는 날, 두 남자 주인공이 등을 맞대고 다수의 깡패들과 싸우는 장면 역시 눅눅한 홍콩 누아르 영화의 단골 메뉴이니까.
비밀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고교생들의 삶 자체가 싱싱하고 풋풋하기 때문이 아닐까. 불쑥 찾아온 사랑이 갑갑한 삶의 전부이고, 그래서 그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려 한 그들.
귀여니의 원작소설에 열광했던 어린 네티즌은 자신에게도 그런 사랑이 찾아올 수 있다는 판타지 때문에, 30대 이상의 세대는 사랑이 전부였던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영화는 이렇게 풋풋하게 비춰지는 게 아닐까.
비록 그 감정이 어설프고 유치한 신파조일지라도. 사랑과 그리움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12세 관람가. 29일 개봉.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늑대의 유혹'의 김태균 감독
“이 영화, 싫어하는 사람은 무지 싫어할 겁니다. 유치하니까요.”
‘늑대의 유혹’의 김태균(44) 감독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 영화에 대해 여러가지 ‘공격형 질문’을 준비했던 기자가 오히려 머쓱해졌다. “처음 원작소설을 읽었을 때는 ‘나, 이 영화 못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까지 털어놓는 감독 앞에서 도대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으랴.
그는 우선 귀여니(19)의 동명 원작소설을 읽었을 때의 생경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구어체도 아니고, 문어체도 아니고…. 단어와 글들이 공중에서 훨훨 날아 다니는 것 같았어요. 몇 번 읽다가 중간에 내던져버렸죠. 그런데 중반이후 갑자기 뭔가 ‘짠’한 게 전해지는 겁니다. 돈 벌고, 삶에 치이다 잊어버렸던, 순수하고 젊었던 그 시절의 뭔가가. 잘하면 액션 멜로 영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더군요.”
김 감독은 그러면서 젊은 배우들과 함께 했던 촬영현장의 즐거움에 대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조한선 강동원 두 스물 세 살의 동갑내기 주연배우들과 6개월 이상을 같이 하다 보니, 고1짜리 아들을 외국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의 처지까지 잊게 됐다는 것. 음악이고, 영화고 젊은 게 최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저는 10대 원작자와 20대 연기자를 연결시켜준 조율사에 불과합니다. ‘화산고’ 찍을 때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연기자들과 작업하는게 괴로웠는데, ‘늑대의 유혹’은 젊은 배우들을 보기만 해도 좋았어요. 그들의 연기, 그들의 장난, 그들의 열정, 모든 게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왜 또 이복남매의 사랑타령이냐?’는 질문에는 “원작에 나온 것을 내 마음대로 자를 수 없었다”는 말로 대신했다. 신파극이 죄악시되는 것 같은 요즘이지만, 동시대 젊은이들이 간직한 사랑에 대한 느낌을 고스란히 전할 수만 있다면, 다른 심한 어떤 것도 영화에 포함시켰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감독의 ‘폼 잡기용 영화’는 포기했다는 이야기다.
“이제서야 제 영화가 장식성을 떨궈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을 보세요. 어디 쓸데없는 장면이 나오나요. 필요한 것만 찍어 보여주죠. ‘늑대의 유혹’에서는 망원렌즈를 사용해 제가 원하는 장면과 컷만 클로즈업 해서 보여줬어요.”
영화를 본 감독의 솔직한 심정이 궁금해졌다. “편집본을 본 여성 모니터들이 우는 장면이 너무 짧다고 아쉬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막판 질퍽한 장면을 1분가량 늘렸죠.
그랬더니, 완성본을 본 영화사 대표(차승재 싸이더스 대표와 김 감독은 오랜 친구다)가 팔에서 뭔가를 털어내는 시늉을 하는 겁니다. 닭살이 돋았다는 거죠. 실은 저도 멜로영화에서 질질 짜는 것은 딱 질색이었거든요.”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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