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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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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말의 힘

입력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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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에는 언령(言靈) 신앙의 오랜 전통이 있다.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고대에는 그 힘의 작용으로 입에 담은 말 그대로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고 믿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도 그 흔적이다. 언령 신앙은 휘(諱), 또는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닿아 있다. 원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휘라고 했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를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했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돼 살아 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지금도 말은 힘을 가진다. 말이 선택돼 쓰일 때의 사회적 분위기, 말이 담은 내용에 대한 언중(言衆)의 묵시적 합의가 그 말에 일정한 색깔과 힘을 부여한다. 신기하게도 영혼이 깃든 것도 아닌데 이런 말들이 여전히 주술적 힘을 발휘한다. 한번 굳어진 말의 색깔과 힘은 세상이 바뀌어도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말의 껍질에 눈길을 빼앗겨 내용의 변화를 간과한다. 또 말의 껍질이 워낙 단단해서 그 속에 파고들어 속살을 되씹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말의 이런 주술적 힘이 흔히 고정관념을 낳는다.

■ 최명길(1586∼1647)은 병자호란 때 주화파의 태두였다. 명청(明淸) 교체기의 정세를 간파한 그는 청과의 화친을 줄기차게 주장했으나 척화파에 밀렸다. 병자호란의 굴욕적 항복 이후 그는 내정 수습과 대명·대청 외교에서 수완을 발휘했고, 식견과 행정력은 반대파조차 평가할 정도였다. 병자호란 초기 적장을 찾아가 항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달아날 시간을 벌었고, 나중에 청에 끌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특히 양반이 환향한 부인의 정절을 이유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외롭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공로는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나 김상헌의 '절의'(節義)에 묻혀버렸다.

■ 우리 현대사에서 '친일파'는 '빨갱이'만큼이나 절대적 힘을 갖는 말이다. 구한말에는 친러파, 친청파 등과 대비되는, '일본과 친한 사람들'이란 껍질이 무른 말이었으나 해방 후 '일제 식민지 통치에 협력한 반민족행위자'를 가리키는 단단한 말이 됐다. 일단 '친일파'로 규정되면 대일 협력의 정도나 내용은 문제가 되지 않고, 그 사람의 다른 민족적 공헌도 참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죽하면 '지일파'란 어색한 말이 쓰일까. '친일파'라는 말의 절대성, 폭력성에 생각이 미치면 정치권을 거쳐, 사회 전체로 번질 조짐인 '친일파' 논란이 전혀 새롭게 보인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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