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자 이 칼럼('진보를 다시 생각한다')에서 진보와 보수에 대한 세 가지 이해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즉, 변화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기준으로 하는 시각, 이념적 내용을 기준으로 하되 정도의 차이로 보는 상대주의적 시각, 이를 넘어서 시장경제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는 절대주의적 시각이 있는데 이 중 세 번째 시각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그런데 이 주장에서 빠진 네 번째 시각이 있다. 그것은 해체주의적이고 포스트근대주의적인 시각으로 진보, 보수가 한덩어리가 아니라 다양한 측면으로 해체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장경제에 비판적인 나는 계급적 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일지 모르지만 남녀 간의 성(Gender·젠더)이라는 면에서는 남성주의적인 보수라는 비판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2002년 대선 당시 여성운동계에서 논쟁이 됐던 것이 바로 박근혜 지지론이다. 전통적인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 박 의원이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라는 등 부정적 이미지로 가득차 있는지 모르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박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여성 후보가 가장 진보적인 남성 후보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박 후보의 경우 특별히 의정활동에서 빛이 났던 것도 아니고 정치적 기반을 아버지에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 박근혜 현상은 오히려 가부장제의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 정도였다.
이 같은 박 의원이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등장해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박 의원이 큰 활약을 한 것은 박정희 향수와 감성정치, 특히 노무현 대통령 반사효과가 핵심이었을 뿐 주목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즉, 거칠고 전투적이며 불안해 보이는 노 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에 세련되고 조용하고 안정감을 주는 박 의원의 스타일이 돋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박 의원의 행각은 주목할 측면이 적지 않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폐지는 아니지만 개정 의사를 밝히고 나섰고 6·15 공동선언과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해 전향적인 평가를 하는 등 한나라당을 냉전수구적 모습으로부터 탈바꿈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후광이나 스타일과 감성정치를 넘어서 내용 면에서도 무언가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난을 통해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지만 한나라당의 최대의 적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탈냉전적 젊은 세대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해 가는 상황에서 계속 지금까지처럼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냉전시대의 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한 2007년에도, 그 이후에도 한나라당의 미래는 없다. 따라서 탈수구정당화와 탈냉전적인 합리적 보수정당으로의 좌선회는 한나라당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리고 박근혜 의원의 최근 행보는 이 같은 올바른 방향으로의 변화라는 점에서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향적 징후들이 진심인지 아니면 단순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인지, 나아가 박 의원이 한나라당의 '골보수'의원들을 설득해 이런 방향으로 당을 이끌어 갈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따라서 박근혜 현상이 단순한 거품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한나라당이 더 이상 과거의 최병렬, 김용갑식의 수구정당, '골보수 정당'이 아니라 21세기를 이끌어갈 합리적 보수정당을 지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원죄인 국가보안법의 폐지, 아니 최소한 대폭적인 축소 개정을 박 의원이 앞장서서 주도해 나가야 한다. 국가보안법, 그것이야말로 박 의원의 진면목을 보여줄 진짜 리트머스 시험이자 진검승부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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