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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24>박찬종 前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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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24>박찬종 前 국회의원

입력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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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24일자 한국일보 5면에 게재된 특별 기고문 '노무현 동지에게'를 통해 한국일보와 맺은 끈끈한 인연은 벌써 1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13대 국회가 1년쯤 지났을 무렵인 89년 3월20일경 통일민주당(총재 김영삼) 소속인 노무현 의원이 "이 국회판은 내 생리에 맞지않아 못해먹겠다"며 의원직사퇴서를 제출하고 행방을 감췄다.며칠간 소용돌이가 야권, 특히 통일민주당에 일었다. 김영삼 총재가 대노(大怒)하여 "당장 붙들어 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등 언론에 여러 얘기가 실렸다. 그는 동해안쪽으로 간다는 말만 하고 몸을 숨겨 가족들도 행방을 알 길이 없다고 했다. 모두가 그의 행동을 돌출적이고, 객기만만한 것으로 폄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같은 야당 의원인데다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 그의 행동을 너그럽게 이해하려는 쪽이었다. 노 의원과는 동향(同鄕), 부산변호사회의 같은 회원, 박종철군 사건 등 시국사건변론 동참 등의 인연과 그의 선거구인 부산동구가 직전 나의 선거구여서 나의 핵심운동원들이 그를 돕는 등 동지적 유대가 있어온 터였다. 그가 자세한 사퇴심경을 밝히지 않았으니, 나는 대체로 추론 할 수 밖에 없었다. 13대국회가 '여소야대'였으나 야권 3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집권당에 휘둘리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 1년내 중간평가공약을 "분열된 야권의 의견불일치"라며 파기해 야권을 모욕했는데도 야당지도자들은 이상하게 침묵했다. 재야변호사로서 노동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온 40대초반의 초선인 노 의원으로서는 분열된 야권, 일사분란한 총재의 통제력, 무기력한 국회 등이 생리에 맞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돌출적 행동을 나무라기 보다는 돌아와서 잘못된 야권과 국회를 개혁하는데 뜻 있는 의원들끼리 힘을 합쳐야 할 계기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문득 "옳지, 신문에 글을 써서 몸을 숨기고 있는 노 의원이 보게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이때 한국일보의 오인환 편집국장이 떠올랐다. 고교1년 후배인 오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국장, 사람찾는 글을 써야겠는데 지면을 주시겠오?" "누굴 찾는데요?" "아, 그 노무현 의원이 행방불명됐지 않소!" 그의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12장 써서 보내십시오." 그는 흔쾌히 답했다.

원고지를 꺼내놓고, 잠시 묵상끝에 그가 읽었을 때 돌아올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지 하고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조간에 글이 나가자 꽤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김영삼 총재도 "수고해줘서 고맙다"고 전해왔다. 나는 궁금해서 노 의원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어 노 의원에게 읽도록 해달라고 밀했다. 이틀이 지났다. 노 의원은 돌아왔고 사퇴파동은 일단락됐으며, 그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그 글을 읽은 것이다.

그 1년 뒤 90년1월, 그와 나는 이른바 "꼬마민주당"창당의 동지가 됐으나, 14대 선거를 앞두고 DJ당과의 합당거부로 갈라선 이후 정치적 입장은 대각을 이뤄왔다. 그는 지금 대통령자리에 올랐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빈다. 옛정을 생각해 충고하면, 아무나 대통령이 될 수 없지만, 모든 대통령들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고뇌하고 신중한 언행으로 정진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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