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가 불황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간 소비가 눈에 띄게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본 국민들은 정부가 상품권을 손에 쥐어줘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은행에 돈을 맡길수록 손해인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도 저축을 했습니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의 악성 종양’이라는 ‘불황 심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일본의 장기불황을 흔히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 경제가 무너진 것은 1991년부터니까 ‘잃어버린 13년’이 정확하지만,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과연 일본은 13년 동안 무엇을 잃어버렸고, 또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무(無)의 세월’을 보냈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한국경제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경제도 지금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으니까요.
저금리에서 버블까지
83년부터 일본에서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중에는 돈이 흘러 넘쳤고, 그 돈들이 모조리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몰렸습니다.
80년대 일본경제가 워낙 잘 나가다 보니 미국 등 선진국은 엔화 가치 상승을 강하게 요구했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저금리 정책으로 대응했습니다. 금리를 내리면 수익률이 떨어져 달러가 일본내로 덜 들어올 것이고(귀해지고), 그렇게 되면 엔화 가치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은행 대신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부동산 매입 등 재테크에 열을 올렸습니다. 은행들은 대기업 고객이 이탈하자, 가계와 중소기업 대출에 목숨을 걸었죠.
가계도 기업도,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동산 담보 대출을 받아 다시 부동산을 샀습니다. 주가는 83년부터 7년간 연 20% 이상 상승률을 지속했고, 부동산값도 90년까지 3배가 뛰었습니다. 2002년 한국의 부동산 붐의 구조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버블의 붕괴
일본 정부가 버블 위기를 감지한 것은 90년 들어서 입니다. 금리를 급격히 인상하고 금융권 대출도 강력 규제하는 등 순식간에 돈줄을 막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버블은 서서히 꺼지지 못하고 91년부터 급격히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가ㆍ주가의 하락으로 부실 채권이 급증하고, 연쇄 기업 도산을 초래했습니다.
13년 불황 속에 일본은 3차례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92년부터 3년간 제로 성장이 계속되자 44조엔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경기 부양 효과는 없었습니다. 95년부터는 금리를 더 내리고,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정책으로 불황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마침 미국의 ‘강 달러’ 정책과 맞물려 잠시 경기가 회복하기도 했죠. 그러나 97년 일본 정부가 재정 재건을 이유로 소비세를 인상, 경기에 찬물을 끼얹은데 이어 아시아 경제위기 영향까지 겹쳐 일본은 98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58조엔의 경기 부양과 60조엔의 공적자금 투입으로 마이너스 성장은 벗어났지만 2001년 금융기관 부실채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또 한번 위기를 맞았습니다. 국제 신용평가기관은 부실채권을 이유로 일본에 대한 신용등급을 내렸고, 이 때문에 3월 위기설, 9월 위기설 등이 나왔습니다.
디플레와 유동성 함정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한마디로 ‘디플레이션’과 ‘유동성의 함정’으로 요약됩니다.
일본은 특히 98년 전후부터 디플레의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디플레란, 물가하락과 경기침체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물건 값이 계속 떨어지면 기업의 생산 의욕도 떨어집니다.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실질금리는 오히려 상승해 기업과 가계의 이자 부담은 더 늘어납니다.
특히 부동산, 주식 등 자산 가격 폭락은 부실채권을 급증시킵니다. 이로 인해 장기간 소비와 투자 위축이라는 경기 침체가 닥치게 되고, 다시 이 같은 경기침체는 물가하락, 자산가격 하락을 부추깁니다. 일본은 98년부터 4년 연속 소비자물가가 마이너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었는데도 일본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저축에만 몰두했습니다. 돈이 돌지 않아, 통화 정책도 한계에 도달한 ‘유동성의 함정’에 빠진 것이죠. 마치 사냥꾼이 쳐놓은 덫에 걸린 것처럼….
무엇이 문제였나
우선 통화정책 실패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83년부터 버블이 쌓이기 시작했는데도,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이유로 저금리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90년 들어 정책을 180도 바꿔, 아주 과격한 금리인상으로 거품 제거에 나섰습니다. 한마디로 ‘열탕-냉탕’ 식이었습니다. 미리 선제적으로, 또 예측 가능하게 해야 하는 통화정책의 원칙을 방기한 것이죠.
두번째로는 미봉책과 대증요법으로 일관했다는 겁니다. 90년대 내내 버블 붕괴로 부실채권이 증가했는데도 부실채권 처리를 질질 끌었습니다.
부실채권 처리에 필수적인 공적자금은 99년에야 투입했습니다. 92년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과감하게 부실채권을 처리했다면 잃어버린 10년은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이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대신 재정확대, 초저금리라는 카드만 줄기차게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여건이 조금만 악화하면 위기가 다시 표면화하는 등 악순환을 겪어야 했습니다.
최근 일본경제의 회복에는 정부 정책 보다는 일본 국민들의 장인정신, 일본 제조업체의 월등한 기술력, 노사간 독특한 상생문화의 공이 큰게 사실입니다.
유병률 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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