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철(34)씨의 살인행각이 경찰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하마터면 영원히 미궁에 빠질 뻔했다. 더구나 첫 살인사건 이후 10개월간 무려 20명의 무고한 시민이 살해되는 동안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해 결과적으로 연쇄살인을 방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경찰은 15일 처음 유씨를 검거해 10여명에 이르는 연쇄살인에 대한 진술을 받아냈다. 하지만 조사도중 유씨가 간질증세를 보이자 수갑을 풀어주고 물을 마시게 한 뒤 유씨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웠다. 유씨는 경찰관들이 서류를 챙기러 방을 나가자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 3층 조사실에서 1층으로 뛰어내려 유유히 정문을 통해 도주했다. 당시 현관과 정문에는 경비를 서는 경찰관이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유씨는 인근에 있던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옷을 챙긴 뒤 마포구에 사는 어머니 김모(59)씨를 찾아가 돈을 받은 후 여의도에 있는 사우나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오전 인천 영종도로 가기 위해 영등포역으로 가다 불심검문에 걸려 다시 검거됐다. 검거 당시 유씨는 자살하기 위해 구입한 수면제를 다량 갖고 있었다.
경찰은 연쇄살인에 대한 진술을 받아 놓은 상태에서 감시를 소홀히 해 유씨가 달아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으며, 도주 후에도 유씨가 자신의 집과 어머니 집을 번갈아 들렀는데도 이에 대한 후속 추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다행히 바로 다음 날 불심검문에서 재검거했지만 경찰의 부실수사로 인해 자칫 사건이 그대로 묻힐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비록 출장마사지 업주의 전화제보로 유씨를 검거하긴 했지만 그간 경찰의 수사허점은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유씨의 네 번째 범행인 지난해 11월 혜화동 노인 살인사건에서는 '버팔로' 신발 자국이 증거로 남았고 폐쇄회로 TV에 유씨의 뒷모습이 잡히기도 했지만 이후 아무런 수사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또 4건의 노인 연쇄살인에서 범인이 모두 금품에는 손을 대지 않은 공통점을 보였는데도 이에 대한 연관성을 전혀 밝혀내지 못한 채 피해자 주변의 원한관계에만 수사력을 모았던 점도 사건해결을 어렵게 했다.
유씨는 경찰조사에서 "다른 곳에서는 범행 흔적을 없애려 노력했지만 혜화동 현장에서는 시간이 없어 문을 발로 걷어차는 과정에서 체모 등이 떨어졌을 텐데 경찰이 이에 대한 수사를 소홀히 한 것 같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밖에 경찰은 여성 출장마사지사가 연속해서 11명이 살해돼 인근 야산에 유기됐는 데도 실종신고나 목격자 제보 등이 전혀 없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관련자 제보가 없다면 수사가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어서 시민들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안형영기자 ahn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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