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일엽편주를 몰고 세계일주를 마무리 한 지 7년째. 20대의 패기로 시작한 도전, 꿈만 같았던 성공이 신기하기만 하다. 시작은 혼자였지만 성공에는 많은 분들이 함께 했다. 특히 한국일보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것은 패기만으로 끝났을 것이다.내가 단독으로 태평양 요트 횡단을 시도한 것은 1990년 11월 7일이었다. 당시 1년 동안의 준비를 끝내고 8.7m짜리 요트 '선구자 1호'(78년 건조)를 마련했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29일 하와이에 도착했지만 배를 수리하고 새로운 장비를 보충하기 위해 적지않은 비용이 추가로 필요했다. 일단 항해를 중단했다. 그때 미주한국일보 하와이지사 정광원 기자가 나의 처지를 듣고는 미주한국일보 장재구 회장님, 변홍진 국장님 등과 상의했다. 한국일보는 하와이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모금운동을 벌였고, 선구자 1호는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듬해 6월 3일 나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나와 한국일보의 아름다운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국일보는 선구자 1호를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해 나의 항해를 기념비적으로 칭송해 주었다.
한국일보의 격려는 나에게 세계일주의 꿈을 갖게 해 주었다. 94년 1월 14일 새로 마련한 '선구자 2호'(9.2m, 74년 건조)를 타고 로스엔젤레스항을 출항했다. 한국인 최초의 도전이었다. 후원자도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30일 후 하와이 도착했을 때 한국일보 독자들과 교민들은 다시한번 나에게 힘을 보탰다. 그들은 다음 목적지인 사모아에도 연락해 내가 편안하게 항해를 계속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사모아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나의 안전을 위해 처음엔 많은 반대를 했지만 나의 결심을 듣고는 누구보다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주었던 아버님이었다. 항해를 계속할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어머님이 나를 세워 일으켰다. "이왕 시작한 일인데 끝을 내야 한다. 국민도 기대를 걸고 있다. 아버님도 그걸 원하셨을 것이다." 7일 후 피지에 도착했고 여전히 교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태풍이 다가오면서 피지에서 4개월 정도 발이 묶였다. 어머님과 가족들에 대한 죄송함에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항해를 당분간 접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때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한국일보에서 후원업체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14일간의 항해 끝에 호주 브리스밴에 도착, 공식적인 발대식을 가질 수 있었다. 한국일보 배성한 부장 등이 후원업체인 '데이콤 국제전화 002' 관계자들과 함께 선구자 2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성한 부장은 이후 선구자 2호가 부산에 닿을 때까지 중간 기착지에 마중을 나오는 등 항해 책임자로서 많은 신경을 썼다. 장재구 회장님도 남아프리카공화국, 파나마, 하와이 등지까지 와서 나를 격려했다. 성난 바다, 긴 피로, 심한 스트레스, 깊은 고독 등 항해의 어려움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뭍에서 나를 든든히 받쳐주는 한국일보의 독자를 생각하면서 힘을 얻었다. 97년 6월 18일 부산에 도착한 선구자 2호는 해양 한국의 의지를 상징하는 징표로 부산광역시에 전달됐다. 도전과 패기를 중요시하는 한국일보의 정신은 태평양을 횡단하고 세계를 일주한 '선구자'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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