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7월17일 '레이디 데이'(Lady Day)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미국의 흑인 여성 재즈가수 빌리 홀리데이가 44세로 작고했다. 그녀가 산 생애 만큼의 세월이 그녀가 죽은 뒤에 흘렀지만 그녀의 목소리, 창법, 제스처, 그리고 그녀 머리 위에 꽂혀 있던 흰 치자꽃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1910년대 미국의 슬럼에서 흑인 여자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당사자의 미래를 위해 추천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일리어노러 페이건 거프라는 이름으로 빌리 홀리데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의 어머니는 13세였고 아버지는 15세였다. 가난과 인종차별은 어린 일리어노러에게 숨쉬는 공기와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공기는 벗어날 수만 있다면 벗어나고픈 족쇄이기도 했다. 좋아하던 영화 배우 빌리 더브의 이름을 딴 빌리 홀리데이라는 예명으로 재즈계를 평정하며 가난에서 벗어난 뒤에도, 그녀는 끝내 인종차별의 족쇄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빌리 홀리데이라는 이름은 많은 흑인 재즈 아티스트들의, 그리고 아마도 백인 재즈 아티스트들의 목표이자 전설이자 장벽이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과 베시 스미스의 음악을 들으며 무대의 꿈을 키웠고, 베니 굿맨에게 이끌려 처음 레코드 취입을 한 빌리 홀리데이는 이내 그 유명한 음악적 선배들 못지않게 이름을 얻었다. 노래는 그녀의 천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나 '포지'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앉아서 오리 요리를 먹는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는 오리 요리를 좋아한다"고 빌리 홀리데이는 자서전에서 회고한 바 있다. 그녀는 제 노래의 독창성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유난했다. 빌리 홀리데이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 위의 어떤 두 사람도 똑같지 않다. 음악도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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