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28일, 사이공은 24시간 통금령이 내려진 '최악의 날'이었다. '항복전야'인 4월 29일 아침 한국일보 특파원인 나는 죽은 듯 적막한 거리를 홀로 달려서 사이공 중앙 우체국 후문의 텔렉스 기계실로 뛰어들어갔다.거기서 가까스로 보낸 기사를 한국일보는 "주월대사관 태극기 19년 만에 하기"라는 제목과 '사이공을 떠나면서 안병찬 특파원 마지막 통신'이라는 컷을 달아 1면 머리(4월30일자)에 올렸다. 그 자리에서 나는 본사 조순환 외신부장과 마지막 텔렉스 교신을 가졌다. 한국일보는 나와 본사의 '최후 텔렉스 교신'을 기사로 알렸다.
본사= 곧 철수하라.
안 특파원= 여기 상황에 따라 가능하면 텔렉스를 다시 해보겠다. 동료들에게 안부 전하고 집에도 잘 얘기해 달라.
그 이후는 탈출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시간이었다. 4월 30일 새벽 4시 10분, 나는 남중국해 미7함대 항모에서 주 사이공 미국 대사관으로 날아온 마지막 탈출 헬리콥터(치누크) 중 한 대에 뛰어 올라 옥상에서 피워 올리는 구조요청의 불길을 굽어보며 절명하는 사이공을 탈출했다. 그로부터 5일 동안 본사는 나의 탈출여부와 생존여부를 몰라 초조와 긴장의 날을 보냈다고 한다. 5월 4일 한국일보는 김포공항으로 귀환한 김영관 대사에게 나의 안위를 집중적으로 물어본 끝에 "용감했던 안 특파원 어딘가에 대피했을 것"이라는 제목을 달아 상자기사로 보도했다.
이렇게 나는 한국일보 소속으로 남베트남 멸망 현장을 취재하다가 스스로 한국일보 기사 감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미군 피난선 서전트 앤드류 밀러 호에 수용되어 남중국해를 건너 필리핀 수빅 만에 닿은 후 다시 수송기로 괌의 난민 캠프로 이송되고 있었다.
내가 괌 총영사관에서 본사와 첫 통화를 가진 것은 5월 4일 오후 4시. 그 순간 편집국 전체가 일제히 환호하는 소리가 수화기로 전해졌다. 한국일보는 "사이공 최후의 새벽 나는 보았다"라는 제목 아래 "마지막 특파원 본사 안병찬 기자 괌도서 급전"을 1면 머리(5월 6일자)에 올렸다.
내가 사이공의 최후를 보도하는 천운의 기회를 잡은 것은 당시의 한국일보 풍토와 관련이 있다. "깊이 계산한 끝에" 나를 이미 해가 떨어진 월남의 밤길에 내보낸 것은 장기영 창간발행인이었다. 직무와 관련한 그의 치열한 기질은 사이공 패망을 눈앞에 두고 내게 보낸 4통의 전문에 나타난다. 4월 23일에 날아든 장기영 창간발행인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지급. 한국일보 안병찬 수신. 만약 불행히도 사이공이 함락 직전에 놓이면 사이공 최후의 표정을 컬러로 찍고 돌아 오라. 양평 기자가 LST를 타면 LST 타는 모양을 찍어라. 현지 사이공의 표정과 사이공 군대의 분투하는 상황도 찍어달라. 베트콩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으나 그런 위험한 일은 안했으면 좋겠다.―장기영."
금년에도 나는 방학을 이용해 호치민에 갔다. 내가 언제나 투숙하는 곳은 웬후에 거리의 팰러스 호텔이다. 창문을 열면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머물던 사무실 건물이 마주 보이고 사이공 최후의 날들의 뜨거운 열기가 되살아 난다.
안병찬씨는 1989년 퇴사 후 경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와 시사저널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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