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7월15일 예술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940년 졸(卒).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지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대학 교단에서 밥벌이를 했다. 벤야민은, 사르트르와 함께, 그런 관례에 대한 두드러진 예외였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대학 제도 자체를 꺼려 대학 바깥에 남았던 반면에 벤야민은, 자신이 그 일원이었던 프랑크푸르트학파 동료들의 관례대로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가르치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프랑크푸르트대학이 그의 교수자격 취득 논문으로 거부한 '독일비극의 기원'(1928)은 벤야민이 생전에 출간한 단 한 권의 단행본이었다. 그의 나머지 저술들은 논문이든 에세이든 모두 단편적인 것이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그가 죽은 뒤에야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저술들은 오늘날의 문화연구가들에게 닳지 않는 사색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영화나 사진을 예로 들며 원본 대용품(가짜)으로서의 복제와는 다른 의미의 복제, 다시 말해 원본에서 독립한 복제를 통해 예술이 만들어지는 시대가 왔음을 지적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 같은 에세이는 이미 1980년대부터 한국에서도 읽히기 시작했다.
텍스트들의 주제와 형식이 워낙 다양했다는 것은 벤야민 연구가들에게 매력이자 난점이다. 벤야민 텍스트의 주제는 독일 고전비극에서부터 낭만주의, 유대주의, 모더니티, 역사학, 언어학, 번역, 영화, 사진을 거쳐 파리, 보들레르, 마르크스주의, 서사 이론에 이르렀고, 그 형식도 논문, 에세이, 단평, 아포리즘 등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이런 전방위적 글쓰기를 수행하며 20대 이후를 사학자(私學者)로 살았다. 그 사학자는, 벤야민 자신의 표현을 빌면, 소멸 직전의 존재 형태였다. 프랑스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은 벤야민은 나치에 쫓겨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려다 좌절되자 자살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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