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서구세계는 엄청난 변화의 시기였다.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은 산업 및 금융 자본의 주도로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는 가장 먼저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을 모델로 프랑스, 독일 등이 산업혁명을 이루어 나가는 시기였다. 미국이나 유럽 공히 산업화는 독점자본의 지배를 낳았고, 독점자본의 지배는 경제적으로는 시장을 절대시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적으로는 적자생존의 원칙을 경쟁에 적용시킨 사회적 다윈주의로 정당화되었다. 대자본의 무자비한 확장은 대중의 피폐화를 야기하였고, 반발을 불러왔다. 고전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사회경제질서에 대한 재편 요구는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으로, 미국에서는 혁신주의 운동으로 나타났다.변화에서 뒤쳐져 있던 러시아는 여전히 봉건적 절대군주의 지배하에서 유럽의 후진국에 머물고 있었다. 러시아의 경제 파탄과 정치 혼란 속에서, 인텔리겐챠라고 불리던 지식인들은 체제 타도를 위해 급진적 방향으로 나아갔고, 결국 1917년 사회주의정권을 창출한다.
유럽과 미국, 러시아에서의 변화와 대응의 핵심에는 언제나 지식인들이 있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설 수 있었을까?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이들 지식인들은 마르크스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기존의 '잘못된' 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믿은 대안적 사회경제질서를 현실화하기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변화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혁명가들이 꿈꾸었던 사회주의적 이상은 결국, 최소한 현실적 적용의 방법에 있어서는 실패였음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들이 제시한 대안은 현재로서는 잘못된 대안이었음을 역사의 법정에서 판결 내린 것이다. 이 점에서 러시아 혁명보다 반세기 앞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발표한 장편 '죄와 벌'은 독단적인 인텔리겐챠들에 대한 경고였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사회의 기생충인 고리대금업자를 죽였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믿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도덕적 상실에 빠져있다. 이것이 바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죄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일종의 사회문제 해결로 내세운 대안은 진정한 대안이 아니었으며, 치열한 고민 없이 독단에 빠진 죄를 범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죄의 대가인 벌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밝히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그 자신과 주변사람들의 고통만 가중시켰다는 점이다.
21세기의 지식인, 특히 현재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지식인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는 이때에, 지식인에게 대안적 질서에 대한 고민을 요구하는 것이, 그것도 제대로 된 대안을 요구하는 것은 우습게 들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이, 나라가 망해가는 지경은 아닐지라도 엄청난 시련에 닥친 것만은 분명하다. 국내외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시련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새삼 열거할 필요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자신들을 보수적이라고 위치 짓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별로 없다. 그저 박정희시대와 같은 성장 우선, 재벌 우선, 아니면 기득권 보호에만 전념하면 되니까. 대안을 고민하는 보수? 말장난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고 고민을 게을리하는 것은 정확히는 자신들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지식인들의 죄이다. 진정한 변화를 꿈꾼다면, 격동하는 국제환경속에서 한국이 생존할 수 있는 발전전략을 제시하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여나갈 때이다.
지식인들이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또한 대안의 제시를 방기한다면, 진보진영의 지지를 받아 성립된 정권의 무능과 좌절을 계속해서 바라만 보아야 하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하용 경희대 국제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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