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클리쉐(cliche)’라고 부르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영화 장면은 나름대로 존재가치가 있다. 비오는 밤 비장감 넘치는 두 사나이의 핏빛 주먹대결만큼 선명한 누아르 영화가 어디 있으며, 언제나 한발 늦게 사건현장에 도착하는 형사만큼 안타까운 미스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또 있을까. 관객은 그냥 편안히 앉아 대대로 내려오는 ‘위대한 영화의 관습’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 골치 아픈 상상력이나 추리, 기대, 반론, 해석 따위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환경 감독의 데뷔작 ‘그놈은 멋있었다’는 상투적이고 관습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결점이 많은 영화다. 학원만화에서 숱하게 보아온, 두 남녀 고교생의 로맨스 구도에서 한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을 들판 위 아름다운 성에 사는 공주님으로 착각하는 여고생 한예원(정다빈)과, 학교 짱에 얼굴도 겁나게 잘 생기고 뭔가 슬픈 그림자도 내비치는 남자 고교생 지은성(송승헌)이 만났다. 거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익숙한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영화는 110여분을 거의 전부 할애한다.
여기까지다.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는 어떠한 새로움도, 빛나는 실험도 없다. 분명 감독의 액션 연출감각은 ‘피도 눈물도 없이’의 류승완 감독 못지않지만, 액션은 어디까지나 지은성의 폼내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정다빈의 앙증맞은 연기도 이미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 질리도록 봤다. 관객이 예상한 대로 이야기는 진행되고, 관객이 원하는 대로 대사가 튀어 나온다.
심지어 카메오(특별출연) 조차 관객에게 익숙한 상황을 그대로 재생산했다. ‘살인의 추억’에서 “향숙이, 예뻤다”를 읊조린 박노식은 또 한번 그 말투를 흉내내고, ‘원조 얼짱’으로 인기를 모은 박윤배도 “나도 얼굴 하나로 밥 먹는 놈”이라고 자신을 내세웠다. 관객을 위해 더 밝힐 수는 없지만 다른 카메오나 조연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휴대폰 메시지를 수시로 날리는 21세기가 배경이지만, 관통하는 정서는 완연한 1970~80년대의 것이다.
지은성이 숨겨진 마음을 담아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는 정수라의 ‘난 너에게’이고, 사랑에 대한 한예원의 판타지는 일본만화 ‘캔디’가 고양시킨 70년대 한국 소녀들의 정서다(만화처럼 안소니, 테리우스, 이라이저를 연상시키는 배역이 많다). 영화의 중요 모티프가 되는 에이즈에 대한 정서도, 에이즈가 국내에 처음 알려진 80년대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할 것 같다. 익숙한 클리쉐의 위대한 승리인가, 한번쯤 품어봤을 사랑에 대한 소년소녀 시절의 판타지 덕분일까.
누구나 겪었고 겪어야 할 17, 18세 시절. 어쩌면 그 시절 자체가 사랑에 서툴고, 삶에 한없이 유치한 때가 아닌가. 고민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시절. 영화에 등장한 요즘 고교생들 역시 서툴고 유치하다 할지라도 그게 무슨 흠이고 대수랴. 15세 관람가. 23일 개봉.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