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중이라는 친우를 나는 잊지 못한다. "너는 콩나물 대가리나 두들길 일이지 팔자에도 없는 원고지는 왜 붙들고 있냐"라는 말을 하면서 문학을 좋아하는 나에게 "문학은 치우고 음악만 하라"고 약을 올리곤 하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하루는 '여원' 에 연재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여원'의 주간 역할을 하고 있던 그가 '바둑 광기'라는 수필로 나를 테스트한 후의 일이었다. 음악가 한 사람을 마음대로 골라서 일화를 소설형식으로 꾸미라는 주문이었다. 매달 60매로 1년 동안 연재를 해보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나는 연재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것이 40여년 전의 일이다.한국일보와의 인연은 '여원'에서의 연재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연재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글 쓰는 일 이외에 피아노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명동의 국립극장에서 한국일보 후원으로 피아노 독주회를 개최한 것이 그 때였다. 독주회를 끝낸 며칠 후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레스리 화이트 피아노 독주회가 있었는데, 그 때 한국일보 문화부장이었던 남욱씨가 "한국일보 후원으로 독주회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여원'에 글을 쓰는 피아니스트이니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피아노 독주회의 평을 한 번 써보라"고 했다.
당시 한국일보에 문학평은 김종길 선생님, 음악평은 박용구 선생님의 글이 자주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00% 무명이었던 나더러 평을 쓰라고 하는 것이 나에겐 놀랍기만 했다. '여원'에서 연재를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는데 남욱씨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무명이라고는 하나 피아노 독주회를 방금 치렀고 글도 쓰는 사람이니 이 청년에게 평을 한 번 쓰게 해보자' 라는 생각을 남욱씨가 한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내 생애 첫 음악평을 한국일보에 쓰게 됐다. 음악가가 쓰는 글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것은 처음 경험한다는 말을 남욱씨가 한 것으로 기억된다. 일본 지휘자 아사히나의 음악회 평도 쓰라고 했다. 그래서 잇따라 평을 쓰게 됐다. 며칠 후 한국일보의 음악평을 앞으로 1년 간 맡아달라고 했고 나는 이 매력적인 제의를 수락했다. 내가 당시 음대 시간강사여서 음악평론가라는 그때로서는 상당히 독특한 직함으로 평이 나가게 됐다. 그것이 1965년께가 아닌가 싶다.
나로 하여금 음악평론가 생활을 시작하게 한 한국일보와의 인연을 두고 나는 가끔 어느 시구를 빌려서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한국일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당시 유능한 젊은 기자로 알려진 손기상씨와도 친분을 맺었었다. 한국일보와 나의 이런 모든 인연을 나는 지금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수십년이 지난 후 안익태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아 한국일보와 공동으로 안익태음악회와 안익태작곡상을 진행하는 등 다시 한 번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음악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불태우게 한 계기가 됐다. 그리고 안익태라는 음악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를 각인시키는 기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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