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장난에 더 이상 못 놀아주겠네요.”MBC 수목드라마 ‘황태자의 첫사랑’(극본 김의찬ㆍ정진영, 연출 이관희) 5회 방영(7일)에서 유빈(성유리)이 자신을 괴롭히는 재벌 2세 건희(차태현)에게 내뱉은 말이다. 이 대사야말로 건희뿐 아니라, 이 드라마 전체를 지적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황태자의 첫사랑’(이하 ‘황사’)은 2003년 최악의 드라마로 꼽혔던 SBS ‘천국의 계단’을 능가하는 퇴행적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황태자가 아니라 '꽝태자'
‘황태자의 첫사랑’은 SBS ‘파리의 연인’ 계열의 뻔한 또 한편의 로맨틱 코미디다. 샌드위치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유빈이 우연히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세계적인 리조트 체인 클럽 줄라이의 회장 아들인 ‘황태자’ 건희를 만나면서 드라마는 시작했다. 황태자는 유빈에게 느끼는 자신의 일방적 사랑의 감정을 지극히 유아적인 방식인 ‘괴롭힘’으로 표현한다. 자신을 속인 유빈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할 것을 요구하다 거절 당하자 회사 면접에서 떨어뜨리는가 하면, 1시간 간격으로 명품 옷과 구두 액세서리를 유빈이 일하는 텔레콤 네트워크 비서실로 보낸다.
발리에 있는 클럽 줄라이에서 일하게 된 유빈의 여행용 가방을 훔치고 이를 돌려주는 대가로 같이 쇼핑 하자는 무시무시한 조건을 내세우기도 한다. 게다가 스노클링을 즐기던 유빈을 바다 한 가운데에 ‘나 몰라라’ 내버려두고 배를 타고 돌아오기까지 한다. 이쯤하면 황태자는 거대 기업을 이어받을 후계자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예의나 상식도 없는 인간이다. 정신연령을 의심케 하는 황태자의 엇나간 행동이 극의 스토리를 이끌고 나가며, ‘황사’는 한국 시트콤의 가학적 문법구조를 그대로 따라간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중학생들 수준에 맞춘 드라마냐’는 비판은 그래서 당연하다. 첫 회에서 유빈이 건희에게 “이 꽝태자야”라고 소리쳤던 게 이유가 있었다.
차태현의 어설픈 왕자노릇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고함을 쳐대는 차태현의 연기는 황태자의 유치함과 엉성함을 한층 더 커지게 만든다. 그의 연기는 거만하지만 알고 보면 순수함을 지닌, 그래서 매력적인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재민(조인성)이나 ‘파리의 연인’의 기주(박신양)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 건희가 유빈을 향해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가 유치하거나, 때로는 불쾌하게까지 보이는 연유도 차태현의 어울리지 않는 황태자 노릇에서 출발한다.
차태현은 망나니인 건희가 왜 그토록 유빈을 줄곧 사랑하는지, 사랑하면서도 왜 그토록 그녀를 괴롭히는지를 단 한 순간 표정연기를 통해서도 보여주지 못한다. 거만함 뒤에 숨은 연약한 내면도, 재벌 2세이기에 앞서 아파할 줄 아는 한 인간의 모습도 발견할 수 없다.
늘 그래왔듯 그의 연기에는 코미디와 애드리브만 있을 뿐이다. 어설프면서도 귀엽고 매혹적이어야 할 황태자의 행동이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얄밉고 변태적으로까지 보이는 건 그래서다.
낯뜨거운 장면과 대사들
엉성한 상황 설정과 엽기적인 대사도 ‘황사’를 말 그대로 황사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텔레콤 네트워크의 실장인 승현(김남진)이 차도 없는 곳에 유빈을 혼자 내려놓고 사라진다든지, 유빈과 승현이 외국업체 회장을 설득하기 위해 휴대폰을 발로 짓밟는 장면은 엉뚱하기 그지없다.
술에 취해 유빈의 방에서 잠을 잔 건희가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지갑에서 수표를 빼 탁자 위에 올려 놓는 장면이나, 유빈의 여행용 가방을 빼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속옷을 꺼내 펼쳐보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황사’가 12세 이상 시청 등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맨 공부 안하는 날라리 년들하구 춤이나 추러 다니더니 똥통 전문대 나와 가지구 좋은 선 자리는 다 놓치구” (유빈 엄마) “너 또 우리 아빠한테 꼬발르게”(건희) 같은 비속어가 남발하는 저속한 대사들은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한다.
게다가 대부분을 협찬사인 세계적인 리조트 클럽 메드에서 촬영한 이 드라마는 ‘1시간짜리 CF’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간접광고의 문제점도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트콤을 벗어나지 못한 드라마 구조와 주연 연기자들의 한심한 연기, 과다한 노출과 위화감만 잔뜩 주는 호사스러운 해외 촬영…. 이런 총체적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황태자의 첫사랑’. 그래서 벌써 2004년 ‘최악의 드라마’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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