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 시장'의 원조격은 김현옥 서울시장이다. 그는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었고 밤낮도 없었다. 그러한 열정으로 재임 4년 동안 엄청난 일을 벌였다. 지금 서울의 골격을 이루는 각종 공사 대부분이 당시에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아파트와 청계고가도로를 만들고 남산터널을 뚫었다. 한강개발, 여의도개발, 강남개발을 처음 시작한 것도 그였다. 숱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서울시의 모습을 바꿨던 그는 결국 자신의 작품인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물러났다.뒤를 이은 양택식 시장도 김 시장 못지않은 불도저 시장으로 불렸다. 김 시장이 벌여놓은 일을 뒤치다꺼리한 데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도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다. 지하철1호선을 건설하고 북악·삼청터널을 뚫어 '두더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만든 역사적인 지하철이 개통된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저격 당하자 행사책임자로 사표를 내야 했다.
양 시장 후임인 구자춘 시장도 추진력이 강하고 저돌적이라는 점에서 뒤지지 않는다. 군 출신인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황야의 무법자'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특히 도로와 교량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다.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 등 3명은 모두 우리나라 개발연대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들이 보여준 열정은 '조국근대화'의 디딤돌이 됐다.
그러나 돌격대식으로 진행된 마구잡이 개발로 인한 폐해도 적지는 않다. 서울시민들은 아직도 당시의 비전없는 도시계획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부실·날림공사의 피해는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이명박 시장도 불도저 시장의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을 듯 싶다.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회장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준 특유의 뚝심과 추진력으로 취임 당시부터 불도저 시장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는 취임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청계천 복원, 뉴타운 개발 등 굵직굵직한 사업을 시작했다. 청계천 복원공사를 시작할 때는 노점상들의 거센 공사 중단 요구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특유의 돌파력으로 반발을 무마해 "이명박 시장 아니면 엄두도 못낼 일"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역대 시장들이 말로만 외치던 강남·북 균형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뉴타운 사업을 제시하고 상인들의 반발을 무마하자 "역시 이명박"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 대중교통체계 개편은 상황이 달랐다. 불도저 시장의 긍정적인 점보다는 부정적인 점이 극명하게 노출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한마디로 이 시장이 시민들을 너무 우습게 본 데서 비롯됐다. 일부에서는 준비부족을 이유로 실시시기를 재고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장은 자신의 취임 2주년 기념일인 7월1일에 억지로 맞추려는 사심이 앞섰다. 청계천 복원공사 때처럼 일단 시작한 다음에야 시민들이 적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돌격대 정신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시민들이 그를 뽑아준 것은 자신이 선거유세 때 밝힌 것처럼 기업에서 익힌 경영기법을 행정에 접목시켜 서울시를 바꿔놓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불도저 시장보다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CEO시장, 경제시장에 대한 기대감이 그를 인구 1,000만명의 서울의 최고관리자로 만들어 줬다. 이 시장은 너무나 평범한 사실을 잊고 있다.
/이충재 사회1부장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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