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한 여당의 최근 행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맹종(盲從)이나 다름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당·청 분리를 통해 견제와 균형을 주장했던 게 엊그제 같은 데, 최근에는 노 대통령의 입장에 따라 대응 방법과 수위가 달라지고 있다.지난달 중순 이 문제가 불거진 뒤 한나라당의 정략적 발상만을 탓해왔던 열린우리당은 8일 노 대통령의 발언 직후 갑자기 공세적인 태도로 선회했다. 이제는 집권당이 '행정수도 이전이 무산되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논리를 앞장서 전파하고 있다.
10일 확대간부회의에서는 "정부 핵심과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절박감"(한명숙 상임중앙위원), "반대운동은 목적의식을 가진 것"(민병두 기조위원장) 등 노 대통령 발언의 '속편'들이 이어졌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11일 아예 "지역주의 색채가 있다" "반대에는 부유층·상류층의 기득권 지키기가 있다"고 까지 발언 수위를 높였다. 정책공방을 스스로 지역주의, 계층 갈등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 언론을 겨냥한 발언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은 일부 신문의 논조를 실천하는 기구"(김현미 대변인) 등의 언급은 "서울 한복판에 거대한 빌딩을 갖고 있는 신문사들이 반대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전에는 한번도 나온 적이 없는 얘기다.
이에 앞서서도 여당에선 김선일씨 참사 직후 반기문 외교장관 문책론이 비등했지만, "사회적 분위기만으로 책임을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노 대통령의 언급이 나오자 마자 꼬리를 감췄다. 이 같은 우리당의 태도를 놓고 당내부에서조차 "갈등조정과 국론통합이라는 정당 본연의 기능을 망각한 자세"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우리당 원내대표단 관계자는 "당의 시각이 노 대통령의 한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정리되는 듯한 분위기"라며 "이대로라면 여당의 존재가치가 없는 게 아닌가"라고 안타까워 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청와대 "국정난맥 언론때문이야"
청와대가 행정수도 이전문제의 초점을 일부 언론과 정부의 대립각으로 잡아가고 있다. 8일 노무현 대통령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 거대한 빌딩을 갖고 있는 신문사들이 반대여론을 주도하고 있다"고 지목한 뒤 9일에는 양정철 국내언론비서관이 조선·동아일보를 적시해 '저주의 굿판'이라는 비난을 퍼부어 주적(主敵)을 분명히 했다.
이는 두 신문사가 충청권 눈치를 보느라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한나라당을 몰아세워 반대론을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전에 '조·중·동'을 뭉뚱그려 대립각을 세웠던 청와대가 중앙일보를 제외하고 조선·동아만 지목한 사실이 눈길을 끈다. "청와대가 조중동 대열에서 중앙을 빼 우호 세력으로 삼으려 한다"는 추정이 많다.
김병준 정책실장은 11일에도 "지난해 24차례의 공개토론회를 가졌다"고 강변했다. 당시 보도를 제대로 안 했으니 국민홍보 부족은 언론 탓이 크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수치로 나타나는 국민의 여론을 감안할 때, 남의 탓을 하는 것은 정부로서 너무 무책임한 자세라는 비판만 더 커진다. 수도권 과밀화 해소, 국토균형발전 등의 필요성을 다시금 논리적으로 홍보해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일부 언론을 대상으로 감정적 언사를 쏟아내는 게 올바른 자세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다시 '친노'대 '반노'의 갈등을 이용해 문제를 풀어가려는 것이냐는 의혹이 나온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한나라 대안없이 비판만 되풀이
한나라당은 여전히 대안 없는 공세만 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부 언론을 겨냥한 주말, 한나라당은 무려 6개의 관련 논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집권 연장용 밀어붙이기식 올인 전략"(한선교 대변인), "대통령이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배용수 수석부대변인) 등 말 만 많았을 뿐 논조는 한달 전과 똑같았다. 박근혜 전 대표도 10일 최고위원 출마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뜻을 물어서 해야지 그냥 밀어붙이면 안 된다"는 답변을 녹음기 틀듯 되풀이했다.
당 안팎에서 "여론의 눈치나 보며 적당히 웰빙하는 이중대 야당" , "국가 혼란을 가중시키는 비겁한 행보" 등 쏟아지는 비난을 아랑곳 않겠다는 태도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11일 "옆에서 뭐라고 해도 우리 갈 길을 가겠다"고 했다. "공세만 있고 대안은 없다"는 지적을 받고는 "수도이전의 비용과 효과 등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대안을 내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한나라당은 '국민적 합의 도출과 알 권리 보장'을 명분으로 당분간 여당에게 이미 거부당한 '국회 내 특위 설치와 외부기관 연구용역 의뢰' 카드에 매달린다는 전략이다. 그러면서 정부·여당이 수도이전에 대한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반대 여론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리겠다는 속셈이다. 김덕룡 대표 직무대행이 최근 사석에서 "속전속결은 패배의 길"이라며 "한나라당은 충분히 전략적으로 가고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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