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직후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데, 해석하기 힘든 통계 수치는 그냥 넘어가자. 숫자를 뚫어지게 보는 것보다 바로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불황인지 느낌이 금방 온다. 얼마 전만해도 점심시간에 자리 차지가 힘들었던 식당이 이제는 한가하다. 세상 살기가 힘들수록 사람들은 그 때가 좋았지 하면서 그 누구를 떠올리고, 옛날을 그리워한다. '백마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기다린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진입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갑자기 높아졌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인 삼성과 현대그룹 창업주들을 다루는 '영웅시대'라는 TV극이 화제다. 첫 방송에서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해 같은 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 오래됐거나 베일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니고 시청자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관심을 끌었다. '압축 성장' '한강의 기적'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오히려 해당 그룹에서 긴장하고 있다. 혹시 흥미위주에 흘러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까 걱정하고 있다.
■ 삼성과 현대에 이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출간됐다. '잃어버린 영웅'이 그것으로, 다른 그룹 총수와 마찬가지로 영웅으로 묘사했다. 저자는 "어려운 시대에 김 전 회장과 같은 영웅이 많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쓰게 됐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과거 경제 신화의 주역들의 행적이 드라마와 소설 등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청년들의 꿈이었고, 이상이었다. '나도 한 번 그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했었다.
■ "우리 기업이 과거 정경유착이나 분식회계 등으로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투명성 제고에 노력하고 있다. 연예인 체육인만 영웅이 아니라 기업인도 영웅으로 대접 받는 시대를 만들어야 2만달러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말이다. 기업은행은 경제발전에 기여한 중소기업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소기업인 명예전당을 만들기로 했다. 김동수 한국도자기 대표 등 4명이 첫 대상이다. 재벌만큼 그 평가가 극과 극을 오가는 경우는 드물다. 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손길승 SK그룹 회장은 법정에서 "어두웠던 한국 기업 성장사의 마지막 책임을 지고 떠나겠다"며 "건전하고 강한 기업과 사심 없는 기업가가 나올 수 있도록 그 동안 과정상의 하자는 이해해 주는 사회적 풍토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언제쯤 재벌 총수를 '영웅'으로 받드는 시절이 올 것인가.
/이상호 논설위원 s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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