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도산'의 일본 촬영현장인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 민속마을. 300여년 전 히로시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에서 설경구(36)는 이미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역도산(본명 김신락·1924∼1963)이 돼 있었다. 일본에 온지 3개월째. 지난 6일에도 그는 38도를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1940년대 스모선수 시절의 젊은 역도산을 연기하고 있었다. 웃통을 벗은 채 일본인 선배 스모선수들에게 쫓기는 장면을 10여차례 반복해서 찍은 후 그는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살이 무척 찐 것 같은데.
"허리를 숙여 발톱깎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원래 73㎏인데 역도산 연기를 위해 몸을 불렸고, 지금 94㎏가 됐어요. 지난해 10월부터 식이요법을 병행하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루 4시간씩 했어요. 똥배가 조금 나왔지만 아직 별 이상은 없어요. 사실 '공공의 적' 찍을 때에도 89㎏까지 나갔어요."
―언제 가장 힘이 드는지.
"물론 연기가 잘 안 될 때에요. 날씨가 덥기는 하지만 이곳 히로시마 풍경이 마음에 들어요. 매 장면을 정성들여 찍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역도산의 제자이자 한국에도 잘 알려진 안토니오 이노키가 촬영장을 다녀갔습니다. 가족생각은 별로 안 나요. 영화가 내 가족이니까…. 말하고 보니까 시를 쓴 것 같은데…(웃음) 다음 주에 서울로 돌아갑니다."(영화는 8월말까지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을 거쳐 역도산의 41주기인 12월15일 개봉한다.)
촬영현장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멀리 도쿄에서 6시간이나 신칸센을 타고 왔다는 일본인 여성은 그가 출연한 '실미도' '박하사탕' '오아시스'를 다 봤다면서, 서툰 한글로 "영화 잘 찍으세요"라는 메모를 전하기도 했다. 일본인 현지 스태프도 그에게 깎듯이 "설 사마(존칭어)"라고 대했다. 극중 일본인 아내로 나오는 일본 여배우 나카타니 미키(28)도 "존경하는 배우다. 뚱뚱한 사람도 이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고 말할 정도다.
이날 밤 다케하라 시내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다시 만난 설경구. 어느새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갈아입은 그가 정종 몇 잔을 들이킨 뒤 말했다. "원래는 이번 영화 안 찍으려고 했어요. '실미도' 찍은 후 한 1년 쉬고 싶었거든요. 1년 전 송해성 감독이 주연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에도 최민식 선배를 추천했었어요. 그러나 더 나이 들면 역도산 같은 역을 다시는 못할 것 같아 결국 수락했습니다."
옆에 있던 김선아 PD가 보충설명을 했다. "미 군정시절인 1950년대, 파란 눈의 덩치 큰 미국 프로레슬러를 한방에 때려눕힌 '리키도잔'(역도산의 일본어 발음)은 일본인의 영웅이었어요.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 신주쿠에서 칼 맞아 죽은 파란만장한 그의 삶은 설경구 아니면 누구도 연기할 수 없어요."
송해성 감독도 거들었다. "처음에는 설경구의 일본어가 걱정이 됐습니다. 영화의 95%가 일본어 대사니까. 그러나 지금은 3∼4분짜리 롱테이크를 찍을 정도로 그의 일본어 실력은 현지인 못지않아요."
다음날 저녁 후쿠야마시 오후테이 호텔 기자회견장. 말쑥한 정장 차림의 설경구는 "이번 역도산 역이 체력으로 밀어붙이는 마지막 연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레슬링이나 일본어, 지금 아니면 언제 배울 수 있겠느냐"고도 했다. 설경구에게 다시 물었다. 역도산의 인생과 가치관을 단 한 문장의 극중 대사에 담는다면 무엇이겠냐고. 지체 없는 유창한 일본어 답변이 돌아왔다. "닷다 이치 도노 진세이, 젠인 부르나(단 한번 뿐인 인생, 착한 척 하지 마라)."
/히로시마=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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