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성들… 비범했던박무영ㆍ김경미ㆍ조혜란 지음
돌베개 발행ㆍ1만1,000원
“제가 죽은 뒤에도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이미 칠남매나 있습니다. 그러니 또 무슨 자식을 더 두겠다고 ‘예기’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기겠습니까.”
부인이 죽으면 남편이 새 장가드는 것이 당연하던 조선시대,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이런 저런 이유로 부인의 생각이 틀렸다고 반박하지만, 그 때마다 신사임당은 전거를 대면서 도리어 남편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당시 여인들은 현모양처와 열부가 될 것을 강요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살다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신사임당은 호락호락하지도, 남편 뜻을 순순히 받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신사임당이 남편에 순응하고 자식 수발 잘하는 대표적 현모양처로 우리에게 각인돼 있다. 조선의 여인상이 현모양처와 열녀, 그게 아니면 민비 장희빈 같은 욕망의 화신으로 박제화해 있기 때문이다.
연세대 국문과 박무영 교수와 이화여대 국문과 김경미 조혜란 교수가 쓴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은 도덕률에 짓눌리면서도 자기의 삶을 당당하게 산 조선 여성 열 네 명의 삶을 그린다. 남존여비사상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산 이들의 삶이 흥미진진하다.
송덕봉(1523~1578)은 자신의 문재(文才)를 임금 앞에 드러내고자 했던, 공적인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 “나는 며느리의 도리를 다했으니, 당신도 사위의 도리를 다하시오”라며 친정에 무심한 남편을 꾸짖었다. 16세기 후반의 이옥봉은 비록 소실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남편을 선택하고 자신이 이백보다 더 뛰어난 시인이라고 자부했다.
안동 장씨(1598~1680)는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친정으로 달려가 아버지가 재가할 때까지 돌보았으며, 임윤지당(1721~1793)은 “비록 여자지만 하늘에서 부여 받은 성품은 남녀의 차이가 없다”며 남성의 전유물인 성리학 공부에 몰두했다.
제주 기생 출신 김만덕(1739~1821)은 제주목사를 설득, 양인 신분을 회복한 뒤, 독신으로 살면서 장사에 뛰어든다. 수완을 발휘해 큰 돈을 벌고 재산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한다.
제주 여인은 섬을 벗어날 수 없다는 국법이 있었지만, 조정에서 포상을 내리려 하자 한양 대궐과 금강산 구경을 소원해 꿈을 이룬다. 풍양 조씨(1772~1815)는 ‘자기록’을 통해 열녀의 길을 택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기록했으며, 19세기의 예인 바우덕이는 사당패 최초의 여자 꼭두서니로 조선 전역을 휘어 감았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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