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면 동 출입구에서 여섯자리의 비밀번호를 눌러야 문이 열린다. 내 집 현관문 역시 또 다른 여섯 자리의 비밀번호를 눌러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원고를 보내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할 때에도 문자와 숫자로 조합된 여덟 자리의 아이디와 또 여덟 자리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원고 뒤엔 열세 자리의 주민등록번호와 다시 열 두 자리의 은행 구좌번호를 적는다. 거기에 현금카드 비밀번호라는 것도 있다.
내 것 말고도 기본적으로 외우고 있어야 할 전화번호도 여러 개다. 아내도 아이도 따로 전화를 가지고 있다. 양가 부모님이 계시고, 수시로 안부를 물어야 하는 형제만도 다섯이다. 함께 문학하는 친구들의 전화번호는 엄두조차 낼 수 없어 아예 문인주소록을 하나는 책상 위에, 하나는 가방에 넣어 다닌다. 3년 된 자동차 번호는 그건 번호를 몰라도 탈 수 있으니, 아직 긴가민가하다. 얼마 전 누가 휴대폰을 바꾸라고 해서 이젠 정말 새로운 번호를 외울 수 없다고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했다. 세상 사는 게 온통 숫자와의 싸움이다. 처음엔 편하자고 시작했을 텐데, 어느 결에 그것들이 우리 삶을 가두는 감옥이 되고 말았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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