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생, 94학번, 99년 6월 육군 00사단 모 부대에서 근무하다 만기 전역한 예비역 병장 김길동씨. 그는 학교로 복귀한 첫 날 받았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수업을 마친 뒤 학교 근처에 있는 한 당구장을 찾아 갔어요. 거긴 우리 학과 선후배 동료들이 자주 애용하는 만남의 장소였죠. 그런데 이에 웬일입니까. 당구대는 온데 간데 없고 PC방이 생긴 거에요.
친구들은 모두 ‘스타크래프트’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어요. 당황한 저는 같이 놀아달라고 떼를 써봤지만 친구들은 ‘테란과 저그도 구분 못하는 너랑 노는 것은 비싼 게임비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저를 따돌리고 말았어요.”
스타크래프트 세대의 탄생
98년 4월 한국에 상륙한 스타크래프트(스타크)는 한국인이 받아들인 외래 문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터넷과 PC산업을 일으킨 PC방 열풍의 주역이 스타크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스타크는 젊은 세대들의 삶의 방식을 뒤흔들었다. 당구장과 만화방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놀이 문화는 변두리로 물러났고, 배틀넷과 온라인 게임이 그 빈자리를 메우며 청년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았다.
스타크는 게임도 훌륭한 산업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99년 500여개에 불과했던 PC방 업소는 스타크 보급 2년여 만에 1만5,000개로 늘어났고, 총 15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99년 10월 스타크가 국내 소프트웨어 최초로 100만장 판매를 달성하자 ‘게임 대박’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고, 신생 게임 벤처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면서 오늘날 중국ㆍ일본ㆍ미국 시장을 휩쓰는 한국 온라인 게임의 신화가 잉태됐다.
전 세계에서 팔린 스타크래프트 3장 가운데 1장이 국내에서 팔렸다. 스타크를 만든 블리자드(Blizzard)사는 한국 시장의 저력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덕분에 스타크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장 많이 팔린 소프트웨어로 기네스 북에 올랐다. 한국이 공급처가 아닌 소비시장으로 세계인의 관심을 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98년 이후 스타크를 배우고 즐기며 자라난 젊은이들은 오늘날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의 최대 소비자 겸 생산자로 자라났다.
'스타크 혁명'은 계속 진행 중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인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PC게임방 체인 사이버파크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스타크는 여전히 이용자들이 가장 자주 찾는 게임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70년 이후 90년 이전 출생 세대의 65% 이상이 스타크를 할 줄 안다는 통계도 있다. 고스톱 다음으로 국민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으면서 지난 2000년 프로게임협회가 탄생했으며, 총 14개 팀 300여명의 선수가 활동 중이다. SK텔레콤, KTF, 팬택앤큐리텔 등 대기업들이 팀 창단에 나서고 있고, 이를 통해 프로리그가 활성화하고 있다.
한국인의 스타크에 대한 열정은 외국인들로부터 경외심마저 불러 일으킨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는 게임이 아닌 예술”이라고 평했다. 올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제4회 행사가 열리는 ‘월드사이버게임즈’(WCG)는 국내에서 안방 잔치로 시작했던 행사였다.
한국의 게임 프로리그 입문을 노리고 이역만리 한국 땅을 찾아오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AMD팀의 베르트랑(22ㆍ프랑스)과 기욤 패트리(22ㆍ캐나다) 등이 ‘코리아 드림’을 이룬 대표선수들이다. 한국은 컴퓨터 게임 대결을 중계방송하는 전문 케이블 채널이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지금 스타크 세대가 이끌어가는 한국 경제는 기술과 아이디어, 열정이 지배하는 정보기술(IT)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인터뷰/ 블리자드 폴 샘즈 부사장
스타크래프트 제작사인 블리자드(Blizzard)의 폴 샘즈(사진) 부사장이 한국을 찾았다. 야심작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의 비공개 베타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서비스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사업 파트너들과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서다.
샘즈 부사장은 스스로를 “스타크 마니아”라고 소개했다. “지금까지 해본 게임 중에 스타크 만한 것이 없으며, 앞으로도 손에서 떼지 못할 것”이라며 애정을 과시했다. 그가 사랑하는 스타크의 매력은 ‘속도감’이다. 이전의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느릿느릿한 진행과 맥 빠진 승부로 박진감이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스타크는 단 ‘1초’의 타이밍으로도 승부가 갈린다.
물량 공세 못지않게 전략적인 구성도 중요하기 때문에 액션 게임 못지않은 긴장감을 준다. 샘즈 부사장은 특히 “먼 외계의 어느 곳에서 서로 다른 종족들이 생사를 건 혈투를 벌인다는 설정만으로도 ‘아드레날린’(흥분 상태일 때 생기는 호르몬)이 솟지 않느냐”고 말했다.
한국 시장에서 스타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친구들과 함께 플레이 하는 게임을 즐기는 한국인들에게 인터넷(배틀넷)을 통해 서로 맞붙을 수 있다는 점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첫 발표후 6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스타크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에게 그는 경의를 표한다면서 “한국은 미국과 더불어 블리자드가 가장 중시하는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팬들이 고대하고 있는 후속작 ‘스타크래프트2’와 콘솔용 액션게임 ‘고스트’의 출시 시기에 대해 샘즈 부사장은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도 꼭 나와야 할 게임이라고 생각한다”며 스타크 마니아들의 꿈이 곧 이뤄질 것임을 시사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 포인트
● 스토리 Story
스타크래프트의 이야기는 공포와 궁금증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SF소설의 구조를 따랐다. 특히 ‘종족 투쟁’이라는 모티브는 ‘절멸’이라는 극단적 폭력의 핵심에다 ‘생존 전략’이라는 당의(糖衣ㆍ약의 겉에 단맛이 나는 막을 얇게 입힌 것)를 입혀 인간의 폭력 본능에 호소한다.“알 수 없는 먼 미래. 인간의 후예인 테란(Terran)족은 내분과 파괴의 오랜 투쟁 끝에 겨우 은하계의 평화를 쟁취한다. 그러나 자원 부족에 맞닥뜨린 그들은 신비한 정신 능력을 지닌 프로토스(Protoss)의 문명을 넘본다. 한편 우주의 귀퉁이를 맴돌던 무법자 저그족이 풍요로운 프로토스의 제국을 침입하면서 은하계는 이들 세 종족의 투쟁으로 다시금 혼란에 빠지는데….”
● 캐릭터 Character
마린(Marine), 질럿(Zealot), 히드라리스크(Hydralisk)는 각 종족별로 스타크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미국 해병대원을 모델로 한 마린은 다른 종족의 기본 유닛과 비교하면 초라할 만큼 유약하고 공격능력 조차 볼품 없다. 그러나 스팀팩으로 민첩성을 높이고 메딕(Medicㆍ의무병) 유닛과 무리를 이뤄놓으면 가장 효율적인 지상 공격 수단이 된다.
저그족의 히드라리스크는 영화 속의 에일리언을 닮은 끔찍한 피조물이다. 강산성의 분비물을 내뱉어 지상과 공중의 모든 유닛을 공격하며, 체력이 저절로 회복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죽지도 않는다. ‘강력한 파괴력과 끈질긴 생명력’이 히드라리스크의 특징이다.
프로토스의 질럿은 다분히 종교적 신념에 바탕한 정신적 에너지가 힘의 원천이다. 마린이나 히드라와 달리 백병전을 구사한다는 것이 특징. 단순 무식하면서도 가장 고도화한 문명의 산물이다. 송강호의 ‘넘버3’ 패러디 등 유머의 소재로도 활용됐다.
● 전략 Strategy
스타크래프트에는 ‘생산’과 ‘전투’, ‘확장’의 3가지 전략이 존재한다. 각각에 능통하면서도 조화시키는 기술이 승리의 관건이다. 몇몇 전문가들은 ‘때를 고르는 능력’도 전략적 요소에 포함시킨다.
생산 전략은 주어진 자원으로 가능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남보다 먼저 효과적인 무력을 구성하는데 있다. 각각의 종족에 따라 생산 시설의 발전과 이에 따른 유닛 생산의 진화가 이뤄지기 때문에 정형화한 생산 전술(Build-order)을 활용한다.
전투 전략의 성패는 확보된 무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달렸다. 적의 주력 부대 구성에 따른 아군의 유닛 구성을 달리하고 이들의 배치를 조정하며 전술적인 순서에 따라 공격을 수행한다. 합동작전, 양동작전, 거짓후퇴, 후방기습 등 병법에나 나올 법한 전술이 실제로 행해진다.
확장 전략은 생산과 전투의 전략에서 파생된다. 부족한 자원과 생산시설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게임 전체의 지형에서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의 진형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 하는 것들이 확장 전략의 요체다.
● 스타탄생 Stars
우리가 여전히 스타크에 열광하는 이유의 3분의 1은 ‘스타크의 영웅들’ 때문이다. ‘테란 황제’ 임요환(24ㆍSK텔레콤), ‘폭풍 저그’ 홍진호(22ㆍKTF), ‘대마왕’ 강도경(22ㆍ한빛), ‘아트토스’ 강민(23ㆍKTF), 파란눈의 전사 기욤 패트리(22ㆍAMD), 미녀 프로게이머 서지수(19ㆍ소울) 등이 대표적.
현재 한국e스포츠협회에 등록된 300여명 중 공인 게임대회에서 연 2회 이상 입상한 정식 프로게이머는 170명에 이르며, 이중 101명의 선수가 프로팀에 소속돼 있다.
국내에는 총 20개의 프로게임단이 있으며, KTF 매직앤스, SK텔레콤 T1, 삼성전자 칸(KHAN), 손오공 프렌즈 등이 대표적. 임요환, 홍진호, 강민 등 유명 게이머들은 억대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 프로게이머들은 월 100만원 내외의 월급과 TV 출연료에 의지해 생활한다.
/정철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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