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는 시대적 조류인 세계화와 민주화가 가장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한―칠레 FTA, 일본―멕시코 FTA가 보여주듯 라틴 아메리카는 전통적인 유럽·대서양국가에서 아시아·태평양 국가로 입지를 전환하며 도약의 돌파구를 찾고 있다. 중견 학자들의 모임인 한국복지국가연구회(회장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가 칠레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 4개국을 찾아가 '세계화―민주화 20년'을 평가하는 현장 기획을 12차례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주
더위와 장마로 고통을 받고 있는 서울과 달리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지금 겨울이다. 산티아고의 겨울은 건기로 악명 높은 매연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매연의 주범 중의 하나인 자동차 행렬에는 현대, 기아, 대우, 삼성 등 한국의 자동차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난산 끝에 탄생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의 발효 100일(9일)을 지나는 지금, 무관세혜택에 안주하고 협정의 성과에 대한 성급한 평가들은 무성한 반면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발전을 모색하는 노력은 부족해 보인다.
"한국 언론의 보도는 지나치게 단기적이고 선정주의적이다." 한―칠레 FTA의 성과에 대한 국내언론의 보도에 대해 칠레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국내보도의 기본 틀은 협정체결 후 무역불균형이 심화해 한국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금년 들어 5개월간의 수출증가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3%에 그친 반면 수입은 95.2%나 급증했고, 무역적자액도 2.5배 가량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증가는 수입의 76%를 차지하는 구리제품의 가격이 중국의 원자재 파동의 효과로 65.8% 상승한 데다가 자원 확보전략에 따라 수입량도 두 배 가량 늘어난 데 크게 기인한다.
한―칠레 친선협회의 칠레 대표인 라반데로 상원의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한국이 90% 유리한 게임 아니냐. 원자재 수입국가와의 총량 비교는 난센스다. 우리는 원자재와 과일을 팔고, 자동차와 핸드폰을 수입한다. 부가가치로는 압도적으로 한국에 유리하다." 그의 지적대로 이번 협정으로 관세인하의 혜택을 받게 된 자동차(51.6%), 무선전화기(80.6%), 비디오카메라(152.5%), 컴퓨터(370.7%), TV(43.8%) 등의 수출증가가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인 수출품목인 자동차는 FTA 발효 이후 시장점유율을 20.5%까지 높이면서 1위 일본(26.1%)을 뒤쫓고 있다. 한국은 구리 이외에도 펄프(265.5%), 돼지고기(101.0%), 그리고 포도주(140.2%), 포도 등의 1차산물의 수입증가가 두드러져 양국간 상호보완적인 교역패턴이 정착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FTA의 첫 국가로 선정한 칠레는 중남미국가들과 유럽연합, 그리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인근 국가들과도 자유무역체제를 구축해 경제성장을 달성한 자유무역의 강국이다. 지난 2,3년간 상대적인 정체에서 벗어나 활기를 회복한 칠레는 올해 4.8%의 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백화점이나 식당에도 거리에도 이런 경기 회복의 활기가 느껴진다. 그런 칠레가 이제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최근 중국, 일본과 인도에 협정을 제의하는 등 아시아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은 이미 아시아가 칠레 수출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며 칠레가 "아시아·태평양 입국을 위해 제2의 개국을 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올해 10월 산티아고에서 열릴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 대한 칠레의 관심은 남다르다.
1차산품 수출 강국인 칠레에 고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부가가치 산업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칠레는 소국에 알맞은 IT 등 첨단 산업유치에 적극적이다.
신장범 주칠레대사는 말한다. "칠레의 산업유치 전략은 대단히 공세적이다. 시장조사비용의 60%, 최고 3만 달러까지, 고용의 경우 급여보조, 고정부동자산 매입비용의 40%, 최고 50만 달러까지 지원하는 획기적인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최근 한국전산원과 칠레 정부는 각 100만 달러씩을 투자하여 IT협력센터를 구축했다." 칠레의 FTA 전략적 목표가 단순히 상품교역확대가 아니라 해외투자유치를 통한 산업구조의 고도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한국에는 한―칠레 FTA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엎질러진 물이고 문제는 이미 체결한 협정이 보다 나은 결과를 낳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FTA의 체결로 정부의 할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원거리와 문화적 이질감, 그리고 시장진입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투자회피를 완화하고 상품과 투자의 진출을 지원하는 전략 개발 등 정부의 할 일은 이제부터다. 특히 중소기업과 지방정부의 노력이 사실상 성공의 관건인 것처럼 보인다. 삼성과 현대와 같은 대기업의 경우 이미 상당히 글로벌화해 있기 때문에 이번 협정의 영향을 덜 받는다. 칠레가 인구 1400만 명 수준의 작은 시장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중소기업의 수출과 투자진출에 유리하다는 것이 칠레의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다행히 KOTRA 칠레지사에 따르면 2004년 인천광역시와 무역협회, 경기도 등 8개의 시장개척단이 칠레를 방문을 했거나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부족한 규모이다.
이번 남미방문에서 느낀 중요한 사실은 지구 반대쪽에 위치해 비행기로만 꼬박 하루가 걸리는 등 멀게만 느껴지던 남미와 아시아는 이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중남미의 먼 시장에서도 중국 효과는 엄청나며 중국은 중요한 경쟁상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2003년 칠레시장을 7.4% 점유하여 한국(3.1%)의 두 배에 기록했고, 조만간 칠레와 FTA를 체결하면 점유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칠레와 중남미 전체에서까지도 중국과의 상품전쟁은 불가피하다. 중국은 급증하는 아르헨티나로부터의 대두수입의 물류비용을 줄이기 위해 안데스 산맥을 관통해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연결하는 안데스 터널을 건설하기로 양국과 합의했다. 우리는 이 안데스 터널을 칠레를 거점으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공략할 수 있는 안데스의 코리안 로드로 활용할 수 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은 남미 시장으로 가는 작은 다리를 놓은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다리를 통해 무엇을 얼마만큼 실어 나르느냐는 것이다.
/마인섭 성균관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협찬: 삼성전자
■ "기아차 딜러" 부드닉 칠레車협회장
마우리시오 부드닉(50·사진) 씨는 기아자동차의 현지판매를 담당하고 있는 중견 기업인으로 최근 칠레자동차협회장에 취임했다. 칠레 시장에서 현대와 기아 자동차는 시보레, 도요타와 치열하게 경쟁한다. 한국을 30차례 이상 방문한 그는 칠레에서 매달 800대 정도의 기아 승용차를 판매한다고 한다.
―자동차협회장 취임을 축하한다.
"감사하다. 한국의 기아자동차 딜러인 제가 칠레 자동차협회장이 됐다는 것 자체가 한국의 자동차가 칠레 자동차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진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칠레 여론은 어떤가.
"이미 우리는 중남미, 유럽연합, 미국 등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한―칠레 협정은 전혀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도 처음 자유무역협정을 시도했던 10년 전에는 반대도 많았다. 그러나 국민들이 협정으로 물건값이 싸져서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어 반대가 사라졌다. 또 자동차, 전자제품 등 협정체결로 득을 보게 된 한국의 제품들을 생산하는 칠레기업이 없기 때문에 특별히 협정에 반대하는 이해당사자들도 없었다."
―자동차 판매에 FTA의 영향이 느껴지나.
"자유무역협정으로 한국자동차가 유리해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 갖고 있던 6%관세의 핸디캡을 만회하고 일본 미국 유럽의 유수한 회사들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됐다. 자유무역협정 탓만은 아니지만 자유무역협정 체결 후 저희 차 판매량이 20% 정도 늘었다."
―한국과 칠레 자유무역 협정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는 서로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창구를 하나 마련한 것이다. 칠레의 시장 규모는 작다. 한국은 칠레를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뻗어가는 교두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협정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서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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