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년 6개월간 논란을 벌인 디지털TV 전송방식이 미국식(ATSC)으로 최종 결정됐다. 이에 따라 이미 디지털TV를 구매한 소비자들은 TV를 다시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됐고, 방송사 및 TV제조업체들도 투자비를 날릴 위험 없이 순조롭게 디지털TV 시대를 준비할 수 있게 됐다.1997년 미국식으로 정해진 디지털TV 방송 방식은 2000년 7월 방송기술인연합회가 '유럽식'(DVB-T) 전환을 요구하면서 국가적 논란에 휘말렸다. 당시 전환론자들은 지방별로 서로 다른 채널번호를 사용해야 하는 미국식에 비해 한 개 채널로 전국 방송이 가능한 유럽식이 주파수 효율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미국식은 이동수신이 불가능하다'는 문제도 집중 거론됐다. 길안내장치(내비게이터)를 이용한 차량용 TV 수신이 각광받으면서 주행 중에도 깨끗한 화질을 보장하는 TV 방송 방식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정통부는 97년 이후 수조원의 투자가 이뤄진 디지털TV 방식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현실론으로 맞섰다. 미국식 디지털TV가 150만대나 보급돼 있는 상황에서 유럽식으로 바꾸려면 무려 12조원의 전환비용이 든다는 주장이다. 특히 고해상도(HD)의 미국식 방송에 반해 유럽식은 표준해상도(SD) 방송이므로 '고화질'이라는 디지털 방송의 장점이 약해진다는 점도 강조했다.
평행선을 달리던 양측 입장은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이 출현하면서 합의점을 찾았다. 유럽식과 유사한 DMB는 이동수신 능력이 탁월하다. 특히 올 하반기에는 SK텔레콤의 위성DMB 서비스, 내년에는 방송사가 참여하는 지상파DMB 서비스 실시가 유력해지자 굳이 이동수신에 매달릴 이유가 사라졌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식으로 전환하면 방송사들은 투자비를 10분의 1로 줄이고 더 많은 채널을 확보해 수익을 늘릴 수 있는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DMB서비스가 예상보다 빨리 진척돼 방송 시장이 양분되자 전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미국식 전송방식이 지닌 산업적 효과도 방송업계의 양보를 이끌어 냈다. 미국식은 95년 LG전자가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 제니스(Zenith)사를 인수하면서 사실상 한국 기술이 됐다. 2005년부터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로열티 수입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이 보유한 디지털TV 관련 특허는 총 3,500여건으로, 미국(3,300여건)·일본(2,200여건) 보다 많다. 정통부 관계자는 "디지털TV 반도체 칩과 셋톱 박스 등 수신장비 시장에서도 한국이 2년이상 앞서 있어 정보기술(IT) 업계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2013년까지 477조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가 소모적 논쟁으로 세월을 낭비하는 동안 미국과 일본이 2006년 전국 방송 개시를, 유럽이 2010년 아날로그 방송 중단을 선언하는 등 디지털TV 시대에 발 빠르게 다가간 것은 분명 큰 손실이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 디지털TV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에서 전파 송출, 수신의 모든 과정을 디지털로 처리해 화질과 음질을 크게 개선한 TV 방송이다. 기존 아날로그TV가 '비디오테이프' 방식이라면 디지털TV는 'DVD' 방식인 셈이다.
● 지상파 DMB
이동 수신에 알맞게 개발된 디지털 방식의 멀티미디어 방송. 휴대폰·PDA·소형TV로 시청할 수 있다. 위성DMB와 달리 지상의 전송탑을 이용해 전파를 송신한다.
■가전업계 "제2 중흥기 왔다"
디지털TV 전송방식이 미국식으로 결정되자 10년 가까이 미국식에 맞춰 디지털 TV 사업을 준비해온 전자업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8일 "TV 산업이 1980년 컬러 TV 방송 실시 이후 제2의 중흥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디지털 TV는 기존 아날로그 TV보다 4∼5배 이상 화질과 음질이 뛰어나 TV를 통해 출연자의 땀구멍까지 볼 수 있는 고품격 TV. 전송방식 논란 해소는 국내 시장수요 창출은 물론, 세계 최대 디지털 TV 시장인 북미 시장으로의 수출 주도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내수의 경우 전송방식 논란으로 구입을 망설이던 대기 수요가 판매로 이어져 침체된 가전 내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방송사들이 앞 다퉈 고화질(HD) 방송에 나서게 되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올해 전체 TV 시장(240만대)에서 3분의 1(80만대)정도 차지했던 디지털 TV 시장이 내년에는 전체 TV 시장의 절반 가까운 120만대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관계자는 또 "국내 TV 시장 최대 중흥기는 컬러 방송 실시로 3년 이상 매출이 5배∼10배 정도 늘었던 80년대 초반"이라며 "디지털 TV는 고부가가치인데다 성장세도 빨라 당시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다가 일본에 앞서 디지털TV 방송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에 세계 최대 디지털TV 시장인 미국에서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미국식 전송기술 원천특허를 갖고 있는 제니스를 인수한 LG전자 관계자는 "TV에 디지털 방송 수신칩 내장을 의무화한 미국의 경우 2007년에는 무려 200조원 가까운 디지털 TV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며 "꾸준히 기술력을 쌓아왔기 때문에 경쟁력의 우위를 자신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디지털 TV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국내 가전사들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가전사들은 관련 기술 개발을 강화, 다양한 제품군을 내놓는 한편 수요를 늘리기 위해 보급형을 중심으로 가격인하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방송사들이 대부분 아테네 올림픽 중계를 HD 방송으로 내보내기로 하면서 디지털 TV 시장에 형성된 '올림픽 특수'가 1차 경쟁 무대가 될 전망. 가전사들은 다양한 판촉행사 및 이벤트를 통해 디지털 TV 판매에 나설 예정이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 TV 3사 "5개 광역시에 곧 디지털 방송"
8일 디지털TV 전송방식 합의에 따라 지상파 방송사들은 수도권 외 디지털 전환, HD 프로그램 확대 등 후속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전송방식 변경을 주도했던 MBC도 공식 입장을 내고 "비교검증보다는 현실적인 산업 논리에 치우쳐 결정된 듯해 매우 유감스럽다"면서도 "4인 위원회의 합의를 존중하고 수용해 방송위원회의 디지털TV 전환 일정에 맞춰 차질 없이 디지털 방송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우선 방송사들은 전송방식 논란으로 미뤄져온 5개 광역시의 디지털 본방송을 아테네 올림픽 전에 개시하고, 시·군 지역의 디지털 전환도 2005년까지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프로그램 편성전략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방송사들은 그동안 전송방식 변경 가능성과 제작비 부담 등으로 방송위원회가 규정한 HD 의무방송시간(주당 13시간 이상)만 지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방송위는 전송방식 합의를 계기로 HD 의무방송시간을 조만간 주당 20시간 이상으로 늘릴 방침이다.
그러나 HD는 제작비가 기존 프로그램의 1.5∼2배 가량 드는데다, 추가수익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방송사들이 당장 드라마 스포츠중계 등 HD 수요가 높은 프로그램 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설지는 미지수. 권순우 KBS 편성정책주간은 "현재 디지털TV 수상기가 100만대 이상 보급됐다고 하지만 실제로 디지털 방송을 볼 수 있는 셋톱박스 내장형 수신기는 2만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기대를 모았던 아테네 올림픽 경기의 HD 중계도 난망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100% HD로 제공되는 것은 개·폐회식, 육상·체조·수영·유도 전경기, 그리고 축구와 농구 결승전이다. 문제는 대부분 우리 선수들의 메달 획득을 기대하기 어려운 종목이라는 점. 지상파 3사는 당초 아날로그와 디지털 채널의 편성을 분리, 디지털 채널에서 이들 경기를 HD 중계할 계획이었으나, 방송위가 "편성분리는 사실상 신규채널을 주는 것과 다름없어 특혜 시비를 부를 수 있다"며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KBS는 2TV에서 낮 시간대 한, 두 시간 정도만 HD중계를 편성할 예정이며 MBC SBS는 HD 중계를 하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전국언론노조는 이날 '시청자에게 드는 글'을 통해 "전송방식 변경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데 대해 자성한다"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이어 "시청자 중심의 방송정책 수립을 위해 정책당국 및 돈벌이에 급급한 통신재벌과의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혀 숙제로 남겨진 이동멀티미디어방송 사업자 선정, DVB―H 서비스 도입여부 등과 관련해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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