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른다, 물결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를몇 억겁이 지난 후의 이 파도 위에도
한 오라기 주름살이 굽이칠까.
살을 에이는 어머니의 뱃길 따라
왜 오고 갔는지를 나는 모른다.
깊고 또 깊은 곳에 남아 있거라.
물보라가 그리는 한 장의 초상화
아, 나의 어머니 모정의 뱃길.
굳이 거창하게 시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다. 단지 물길처럼 마음 또한 이렇게 흐르는 것을.
1956년, 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초등학교 6년을 졸업한다는 것은 지금의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보다 더욱 귀한 일이었다. 그것도 스무 명이 채 못 사는 자그마한 섬마을 출신의 여자아이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말이 좋아 섬마을이지, 내 가족을 포함해 겨우 세 가구가 살았던 그 섬에서는 생계를 위해 약간의 채소와 나물을 육지에 팔러 나가기 위해 이용했던 나룻배 한 척만이 외부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 달빛에 의지해 혼자 노 젓는 방법을 익히셨다. 병중인 아버지와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오랜 세월 동안 배우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신 어머니는 절대로 딸에게 문맹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결심하셨다.
내 어머니 박승이는 그렇게 6년 간 전남 여천군(현재 여수시) 가정도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 노를 저었다. 시계는커녕 수탉도 없던 새벽, 어머니는 오직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로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며 조각배를 띄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풍 사라로 산산조각이 난 배의 파편을 안고 통곡했던 어머니, 한겨울 추위에 갈라진 손등으로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파도를 헤쳐 나가던 어머니였다.
말로는 표현 못할 6년의 세월. 마침내 졸업식 날이었다. 어머니는 박수갈채와 울음바다 속에 '장한 어머니 상'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우리의 사연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문희 기자로 인해 '모정의 뱃길 3만 4천리'는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며 우리 모녀는 한국일보와 인연을 맺게 됐다. 1962년 2월 14일자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그때 받은 격려 편지는 국내외에서 하루 200여 통 이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정의 뱃길'이란 이름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도 불려졌다. 라디오 연속극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후 나는 여수에서 중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대학(성균관대 국문학과)을 나왔다.
이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나는 당시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다. 딸 가족을 위해 새벽 기도를 다녀온 후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어머니의 얼굴은 마냥 평화롭다.
내가 한석봉이나 이율곡이나 맹자처럼 훌륭하지 못한 탓으로 내 어머니가 그들의 어머니처럼 길이길이 기억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어머니를 기억해 이런 지면을 통해 어머니에게 감사와 사랑의 글을 올릴 수 있게 해 준 한국일보에 감사한다. 나 또한 어머니의 발끝에도 전혀 미치지 못하나마 당신의 모습을 닮으려 한다.
이제 57세가 된 정숙현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아직도 정정한 80세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1986년부터 공생복지재단 산하 서울특별시립한남직업전문학교 미용과 교사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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