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이 가신 지 벌써 6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무덤에 한번은 가보고 싶어 식구들의 도움을 받아 2년 전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호랑이 같던 시어머니와 늘 어머니를 힘들게 하던 남편 옆에 누워있으니 어떠세요? 어머니가 좋아하던 제비꽃이 묘지 앞 여기저기 피어있었습니다. 너무 착하고 순해서 그렇게 모진 인생을 사셨나 봅니다.묘지 앞에서 우리 형제들이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했습니다. "살아생전 할머니 아버지 두 모자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는데, 죽어서도 나를 그 옆에 나란히 눕게 하느냐고 원망하실 것 같다"며 당신의 아들 딸들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가시밭 인생길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할머니의 모진 시집살이와 아버지의 손찌검, 또 장애 자식을 둔 어머니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자유를 잃고 억류된 삶 속에서도 어머니는 오로지 이 못난 딸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사셨습니다.
당신이 살아온 인생 길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갓 돌이 지났을 무렵 저는 심하게 소아마비를 앓아 앉지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어차피 못 고친다고 포기하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고쳐서 걷게 해 줄 거라고 다짐을 하며 제가 스무 살이 넘도록 좋다는 곳은 다 업고 다니셨습니다. 바쁜 농사일은 돌보지 않고 쓸데없는 짓하고 다닌다고 아버지께 매도 많이 맞으셨죠.
집안 형편은 좋았지만 할머니께서 경제적인 것은 다 맡았기에 어머니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오직 아이 낳고, 일만 하는 사람이었지요. 새벽부터 들에 나가 밤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올 정도로 일했지만 어머니는 자유가 전혀 없었지요. 어머니는 수중에 항상 돈이 없어 할머니와 아버지 몰래 곡식을 퍼내어 머리에 이고 병든 딸을 등에 업고 배를 곯아가며 몇 십리를 걸어 다니셨지요. 치료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늘 우셨습니다. 지옥 같은 집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에. 할머니는 온갖 욕설을 다 하셨고, 아버지께서는 닥치는대로 어머니를 향해 물건을 던지셨습니다.
지옥 같은 세월 속에서 차츰 저는 앉기도 하고, 목발에 의지해 걷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무서워 그냥 저를 버려 두었더라면 지금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의 그 희생이 있어 못난 딸은 이제 결혼해서 아들 딸을 낳아 기르고 삽니다. 어머니! 제가 원하는 것이라면 단 한번도 마다하거나 귀찮아 하지 않으시고 종노릇하다시피 저에게 희생하셨습니다.
할머니는 다른 손자들은 다 귀여워하고 책임을 잘 감당하셨지만, 저에 대해서는 집안의 수치로 알고 먹는 것, 입는 것까지도 다른 형제들과 차별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마치 데리고 온 자식처럼 부엌에서 몰래 맛있는 음식을 저에게 챙겨 먹이곤 하셨지요. 한약 한 첩 다려 먹이려 해도 할머니와 아버지 눈치가 보여 몰래 외삼촌댁에서 다려와서 먹이시던 어머니, 당신과 나는 늘 그렇게 서럽게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몇 번을 나를 업고 죽으려고 냇가에 가서 "니캉 내캉 죽자" 하시며 한참을 서서 울다가 돌아오시곤 하셨지요. 그러나 다른 자식들의 장래에 화가 될까봐, 당신이 어머니를 일찍이 여의고 서럽게 살아왔기에 자식을 두고 모진 맘 못 먹었다고 하셨습니다.
벌써 저의 나이 47세, 지금 두 아이의 엄마지만 아직까지 당신의 따뜻하고 포근했던 품속이 그립습니다. 어머니! 이 다음에 어머니를 만나면 그때는 제가 종노릇을 하겠습니다. 당신의 배를 빌어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합니다.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며 살아온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정란· 부산시 영도구 동삼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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