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힘들다. 죽겠다.' 28년 넘게 환경운동을 해오면서 절대로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3가지 말이다. 이 세 마디를 입 밖에 내지 않도록 다독거려준 수많은 시민들이 있지만 빼놓을 수 없는 친구가 바로 한국일보다. 한국일보는 우리나라 환경 시민운동의 최대 지원세력이자 '고집쟁이' 환경운동가의 최고 우군(友軍)이었다. 바쁘지 않게 일손을 덜어주고, 힘들지 않게 거들어주고, 죽지 않게 부축해주었다. 자칫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지 모를 우리 환경운동가들의 목소리를 수백만 시민들에게 들려주고 개발주의자들과의 외로운 싸움에 힘을 실어주었다.그러니까 꼭 10년 전이다. 1994년부터 '가자! 녹색생명시대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환경운동연합이 한국일보와 함께 6년 동안 펼쳤던 녹색생명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민적 캠페인이었다. 고려대 언론대학원 3기로 만난 당시 장재근 한국일보 사장과 정몽규 현대차 부사장, 이웅렬 코오롱 회장 등 30∼40대 젊은 그룹이 모여 "21세기 화두인 환경을 국민운동으로 만들 수 없을까"라며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것이 이 운동이었다. 마침 한국일보의 상징인 녹색 깃발과 창간 40돌이라는 계기도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녹색생명운동은 신문사에선 편집국장부터 팀원이 됐고 환경운동가 6명이 상근하면서 1회성 이벤트가 아닌 6년 동안의 파격적인 지면으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갔다. 정부도 하지 못한 전국 대기오염 지도를 시민 1만 여명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고 서울 시민 5만 명의 인간띠로 남산을 껴안아 도시 숲의 소중함을 깨우쳤다. 한강 껴안기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7만 명이나 모였다. 국제회의에서 이 사례를 말했더니 한국이 이토록 역동적인 곳인지 몰랐다며 감탄을 터뜨렸다.
녹색생명운동 5년차였던 99년 4월 지구의 날. 녹색생명팀은 서울의 중심 광화문을 하루 만이라도 자동차 공해가 없는 거리로 만들 궁리를 했다. 당시 고건 서울시장의 동의까지 얻었지만 정작 허가의 칼자루를 쥔 경찰은 난감해 했다. "광화문이 막히면 강남까지 마비된다"는 우려가 나왔다. 4월 춘투가 한창인 노동계가 집회에 가세하면 곤란하다는 주장에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오전 10시부터 오후3시까지 5시간 사용을 겨우 허락받았다.
광화문 거리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다는 소식에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자동차와 공해가 사라진 광화문 왕복 16차로는 그렇게 넓어 보일 수가 없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응원 때 광화문을 열어준 것도 그때의 학습효과가 아닌가 싶다.
3년간 사력을 다해 펼쳤던 동강댐 백지화 운동은 한국일보와 함께 시작해 한국일보와 함께 결실을 맺었다. 국민적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일부 신문들이 댐 건설 쪽으로 기울었을 때 한국일보는 대대적인 '동강댐 총점검'시리즈를 시작했다. 환경운동연합 사무실 앞마당에 각계인사 33명이 33일 동안 천막을 치고 농성할 때 전국의 어린이들이 보내온 노란 손수건으로 농성장 마당이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이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밤낮 동강과 서울을 오가며 펼친 동강살리기의 열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각계의 지지 선언이 이어지고 마침내 동강댐이 백지화 됐을 때 기분은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환경문제에 있어서 '지뢰밭'이다. 잘 못 밟으면 터진다. 경제논리에 쫓겨 정부도 시민도 아직 지뢰밭인지 모르고 산다. 인류는 46억년 동안 지구가 묻어둔 석탄·석유·가스라는 '탄소 통조림'을 소비라는 이름으로 최근 100년 사이 다 까먹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지구의 환경 용량을 초과해 황폐화 시킨 결과 나타난 것이 최근 빈발하는 이상기온이다.
소비를 덜 하면서 환경을 보존하고 상품 소비 만큼 행복을 주는 것이 문화와 예술이다. 이 영역에 가장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여성이다. 그래서 21세기는 분명 환경과 문화와 여성의 시대이며 이 세가지는 서로 맞물려있다. 한국일보가 이런 비전을 잘 담아내고 이 세 가지가 균형 잡히도록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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