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에 뜨거운 논란을 불러왔던 1997년 12월 보라매병원 사건에 관한 재판이 '퇴원하면 사망할 수 있다'는 의사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퇴원을 강행한 환자의 보호자에게는 '살인죄'를, 보호자의 요구에 따라 환자를 퇴원시킨 담당의사에게는 '살인방조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최종 판결이 났다. 이 판결은 의료 현장의 실상을 간과한 잘못된 판결이기에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첫째, 의료비나 생계비에 대해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 경우에도 환자의 부인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집으로 가면 사망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인은 왜 그런 결정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부인 입장에서는 의료비에 대해 아무런 지원도 없고, 생계를 도와줄 적절한 사회보장 제도도 없는 상황에서, 회생 가능성이 높지 않은 환자를 많은 비용을 들여서 생명유지를 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가 그 부인을 비난할 수 있는가. 사회제도는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일까.
둘째,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병원에 오지 못하고 집에서 임종하는 환자의 보호자는 '살인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적극적인 치료를 한다면 생명이 연장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을 하지 않아 생명을 단축시킨 것이 유죄가 성립된다고 하자. 우리나라는 매년 10만 명 이상의 환자들이 집에서 임종하고 있다. 보호자들이 이 환자들을 병원으로 모시고 와서 연명장치를 사용할 경우 수 주 내지 수 개 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데도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킨 셈이다. 이 모두가 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의과학의 발달로 생명 연장을 위한 의료기기의 기능이 향상되어 수년 전만 해도 같은 상황이라면 사망했을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고가의 연명장치에 의존하여 수 일에서 수년까지 죽음을 미루고 있는 것이 이미 사회문제화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이번 판결 이후 더욱 늘어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의료비에 대한 사회적 부담뿐 아니라 실제로 회생 가능성이 높은 응급환자가 중환자실을 이용하지 못해 사망하게 되는 윤리적인 문제까지 발생하게 될 것이다.
또한, 보라매병원 측이 최선을 다해 끝까지 환자를 관리했고 그 환자가 결국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 들어간 비용은 누가 부담하고 책임질 것인가? 환자보호자는 원하지 아니한 중환자실에서의 연명치료였기 때문에 더 이상 비용 지불을 하지 않겠다고 할 것이고, 사회보장 제도가 그 손실을 보전해 주지도 않는다. 모든 비용은 의료기관의 손실로 귀착되는 것이다.
치료만 하면 생존과 치유가 가능한 질병을 가진 환자들이 돈이 없어서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러한 환자의 의료비를 병원이 다 부담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병원과 담당의사에게 살인죄를 적용한다면 이미 많은 의사들이 병원이 아닌 감옥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책임만 따지지 말고 제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복잡한 의료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진국에서는 이에 대한 법적장치를 정비해 놓고 있으며,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의료복지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열악한 사회복지 제도와 미비한 의료법 체계로 야기된 '보라매병원 사건' 판결로 인해 의료 현장에서 앞으로 야기될 사회적·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허대석 서울대 의료정책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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