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태릉선수촌. 트랙은 텅 비어 고즈넉하다. 먼발치다 싶더니 쏜살같이 질주한 이재훈이 어느새 코앞이다. ‘찰칵’ 매정하게 스톱워치를 누른 이진일 코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막판 스퍼트(역주)가 너무 느려. 한방에 치고 나와야지.” 고개 숙여 가쁜 숨을 들이킬 틈도, 벌개진 낯을 닦을 새도 없다. 이재훈은 스타트 라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달린다.“올림픽의 의의가 뭐죠?”
이재훈은 오히려 되묻는다. “당당히 참가하는 겁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트랙을 달리는 것 자체가 제겐 영광입니다.”
아테네올림픽 육상 남자 800m에 출전하는 이재훈(28ㆍ고양시청)은 지난달 10일 대구에서 열린 전국육상선수권 예선에서 자신의 최고 기록인 1분46초79로 올림픽 B기준(1분47초00)을 넘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내 육상 트랙 종목에서 귀중한 아테네행 티켓을 따냈지만 영광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올림픽 메달, 그것도 금빛 메달이 아니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무관심을 뒤로하고 그는 지금 올림픽의 진정한 의의를 되새기며 쏟아지는 땡볕 아래 뛰고 또 뛴다.
하루 24㎞, 400m 트랙이 60바퀴다. 특기가 “밥 먹고 뛰기”라고 농을 던지지만 이재훈에게 하루하루 고된 훈련은 매순간 탈출하고픈 감옥이고 지옥이다. “그나마 지금은 나아요. 2002부산아시안게임 예선에서 6위로 탈락했을 땐 악몽이 따로 없었죠. 선수촌을 떠나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김용환 코치를 따라 지난해 1월 고양시청으로 둥지를 옮겨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 해 6월 전국육상선수권에서 우승(1분47초63)하면서 보란 듯 재기했다. “뛰는 건 제 몫이지만 기록은 주위 분들이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
그때까지 자신의 최고기록은 2002년 아시아그랑프리대회에서 세운 1분47초06.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선 1분47초 벽을 넘어야했다. 김 코치에 이어 그를 도와준 건 바로 이진일코치(32).
10년 동안 깨지지 않는 800m 아시아기록(1분44초14) 보유자이자 1994히로시마, 98방콕 등 아시안게임 2연패에 빛나는 ‘한국 중거리스타’ 이진일이 올해 2월 국가대표 코치로 트랙에 돌아온 것. 이 코치는 95년 무심코 먹은 감기약이 금지약물 양성판정을 받아 2년간 자격정지를 당해 최고의 전성기에 96애틀랜타올림픽을 밟지 못한 비운의 스타이기도 했다.
“내 몫까지 뛰어라. 그리고 나를 뛰어넘어!” 대학 후배(경희대)이자 선수시절 이재훈과 한방을 쓰던 룸메이트였던 이 코치는 그렇게 다그쳤다.
몰아세운다고 기록이 쑥 오르는 법은 아니다. ‘스포츠는 과학’이라는 원칙에 따라 이 코치는 체육과학연구원 성봉주 운동생리학 박사에게 ‘SOS’를 쳤다. 성 박사는 이재훈의 몸에 인공위성 자동항법장치(GPS)를 달아 레이스 장면을 찍어 구간별 심장박동수와 순간속도를 분석했다. 그리고 막판 스퍼트를 위한 사이벡스(등속성근력측정) 윙게이트(사이클) 등을 실시했다.
그리고 지난달 이재훈은 자신의 기록을 0.21초를 단축해 1분46초79로 110m 허들 박태경(24)에 이어 나란히 아테네행을 예약했다. 이재훈은 “페이스메이커로 뛰는 후배 두 명과 뒷바라지하는 아내까지 6명이 0.01초씩 힘을 보태준 것”이라고 했다.
아테네올림픽 남자 800m 예선은 다음달 25일. 이재훈의 목표는 “예선을 넘어 결선에 올라 딸에게 돌(다음달 21일) 선물로 바치겠다”고 했다. 800m 세계기록은 97년 케냐 출신 윌슨 킵캐터(덴마크)가 작성한 1분41초11. 하지만 이 코치는 “45초대만 뛰어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전망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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