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전통적이거나 아주 현대적인 곡만 연주합니다.”‘두 얼굴의 연주자’ 이지영의 말이다. 산조나 정악을 연주할 때면 쪽찐 머리에 한복차림이 그렇게 곱고 얌전할 수가 없다. 현대음악을 할 때는 딴판인 것이, 실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 열정적 모습으로 확 바뀐다.
가야금 연주박사 1호이기도 한 그는 전통과 현대의 양 날개로 날고 있다. 양 날개 모두 튼튼해서 기량과 활동이 독보적이다.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공존하는 한국현대음악 앙상블도 만들어 이끌고 있다. 이 단체는 여러 작곡가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많은 곡을 초연하면서 국악을 바탕으로 한 21세기 한국음악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현대음악이나 창작곡 초연은 몹시 고생스럽다. 까다롭고 힘들어서 남들이 잘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이다. 이번 음반도 외국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기까지 밤을 새가며 작곡가와 팩스로 의견을 나누고, 외국어 사전을 뒤적이며 악보를 읽는 등 숱한 고생의 결실이다. 그렇게 현대 국악의 최전선을 지키면서도 그는 무엇보다 전통을 중시한다. 전통음악을 더 좋아하며 ‘전통음악 연주자’라고 생각한다.
“전통과 현대는 결코 별개가 아닙니다. 전통 안에서 모든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창작음악도 전통에 굳게 뿌리를 둔 것이라야 깊이가 있고 생명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의 음악이 단단하고 미더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경주 출신으로 다섯 살 때 가야금과 판소리, 전통무용을 배우며 국악에 입문했다. 그의 바람은 가야금이 세계인이 사랑하는 악기가 되는 것. “가야금으로 모든 세계의 음악을 연주하며 가야금의 미래를 열어가고 싶습니다.”
가야금은 우리나라 전통악기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 악기 개량과 창작도 활발하다. 그러나 가야금 음악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모색 단계다.
전통에 갇혀 박제가 될 수는 없으니 새로운 음악이 계속 나와야겠지만, 오늘을 호흡하며 세계에도 통할 수 있는 가야금 음악의 형태는 아직까지 뚜렷이 붙잡히는 게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야금 연주자 이지영(39ㆍ용인대 교수)의 새 음반 ‘8개의 정경’(C&L뮤직 발매)을 만나니 눈이 번쩍 뜨인다. 가야금 뿐 아니라, 국악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만한 획기적 음반이기 때문이다.
‘가야금을 위한 세계의 현대음악’이라는 부제 아래 우리나라와 외국 작곡가들이 쓴 현대음악 8곡을 모았다. 강석희 구본우 나효신 이해식과 다카하시 유지(일본), 류홍준(중국), 클라우스 후버(스위스), 하비에 알바레스(멕시코)의 곡이다. 대부분 이들이 국내외 무대에서 세계초연이나 한국초연을 한 것들이다.
1960년대 이후 많은 가야금 창작곡이 나왔지만,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느낌부터 확 다르다. 대체로 매우 현대적이고 실험적이다. 가야금과 국악에 대한 상식을 깨뜨리는 곡들이라 낯설거나 더러 불편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곡마다 가야금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것이 놀랍다.
가야금이 얼마나 현대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고, 또 민족악기라는 변방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인 악기로 보편성을 얻을 수 있음을 입증하는 곡들이다.
작곡가마다 서로 다른 개성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기도 하다. 예컨대 강석희의 ‘가야금을 위한 다섯 개의 정경’은 ‘더 이상 현대적일 수 없는’ 곡이다.
하도 어려워서 하루에 한 마디씩 연습했다고 한다. 나효신의 ‘석굴암에 다녀와서’는 전에 없던 새롭고 다양한 연주기법을 요구하는 곡인데, 가야금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표현영역을 극대치까지 끌어올린 작품이다. 구본우의 ‘원근(遠近)’은 가야금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현악3중주와 협연하는 곡으로 국악기가 양악기와 만날 때 묻히거나 밀려나지 않고 본색을 지키면서 대등하게 어울리는 방식을 보여준다.
클라우스 후버의 ‘거친 붓끝’은 완연한 현대음악이면서도 언뜻 산조의 느낌이 날 만큼 한국 전통음악의 핵심에 근접해 있다. 하비에 알바레스의 ‘가야금과 컴퓨터를 위한 만남’은 컴퓨터음악 녹음 테이프를 틀어놓고 연주하는 곡이다.
가야금 연주ㆍ작곡의 명인 황병기는 “이 음반은 이름 그대로 ‘가야금을 위한 세계의 현대음악’ 이 어디까지 와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가늠케 하는 역사적 음반”이라고 평하면서 “이지영은 이 시대의 진정한 개척자적 가야금 연주가”라고 부른다. 이 음반은 가야금의 가능성과 세계성을 탐색하는 진지한 시도이다. 더구나 그 결과가 만족스러워 더욱 가치가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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