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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14>안상수 인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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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14>안상수 인천시장

입력
2004.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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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코뜰새 없이 바쁜 요즘도 나는 매일 아침 대여섯시에 어김없이 눈을 뜬다. 그리곤 조간신문들을 훑어 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나에게 신문, 특히 한국일보는 신문 그 이상의 의미다. 청소년시절부터 신문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삶의 한 방편이었다.한국일보와의 인연은 인천중 2학년이던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학비를 벌고 동생들을 돌보기위해 조석간으로 발행되던 한국일보 배달소년으로 일하기 시작했다.매일 새벽 4시반께 동인천역에 신문이 도착하자마자 100∼110부 가량을 챙겨 동인천역에서 인하대 인근까지 배달을 했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단독주택이었고 신문을 구독하는 가정도 드물었다. 지금이야 오토바이, 자전거 등을 이용하지만 그때는 발품을 파는게 최고 였다. 한시간이상 할당량을 소화하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곤 했다.

신문을 들고 뛰다 보면 숨이 차 가슴이 터질듯할 때도 많았다. 다 그만 두고 잠이나 실컷 자면서 친구들하고 어울려 단팥빵 사 먹으며 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힘들때마다 부모와 동생들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뛰고 또 뛰었다.

나는 학교수업이 끝나는 오후 3시께면 석간배달을 위해 또다시 학교에서 10분거리의 지국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때 한국일보 지국에는 약 35명 가량의 배달원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고등학생들이었고, 내 또래 약간명과 서너명의 어른들도 있었다.

내가 한국일보를 배달하던 시절에는 신문이 4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신문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거나 배달된 신문을 개가 찢어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어 아저씨(지국 주간)들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야단을 맞지 않기 위해 접은 신문을 담장넘어 현관 앞에 떨어지도록 '신문던지기' 연습을 하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한달 일하고 손에 받아쥔 돈은 약 4,000원. 이 돈으로 학비(당시 한학기 4,000원)를 대고 생활비에도 보탰다. 한국일보 지국은 지금도 동인천역 옆 3층 건물에 녹색기를 휘날리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기영 사주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당시 한국일보는 사회부를 중심으로 소위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배달소년이던 우리도 어깨를 으쓱하곤 했다. 특히 63년 11월 시커먼 제목으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서거를 알렸던 새벽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도 배달소년으로 꿈을 키워가던 40년전을 떠올리곤 한다. 신문을 돌리기 위해 뛰어다녔던 수도국산, 배다리, 동인천 등을 지나다보면 옛기억이 새로워진다. 신문다발을 옆에 끼고 숨이 차오를때까지 달렸던 '한계상황 속에서의 뜀박질'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탄치 않았던 학창시절, 도전의 연속이었던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삶, 기쁨보다도 좌절과 고난이 많았던 정치인으로서의 생활속에서도 지금의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고된 기억' 때문이다. 260만을 대표하는 시장이 된 지금도 한국일보를 들고 뛰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언제나 활기넘치던 젊은 신문 한국일보와의 인연은 내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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