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출처를 놓고 "안기부 예산"이라는 검찰 주장과 "YS 비자금"이라는 변호인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던 안풍(安風) 사건 항소심 공판이 5일 변호인의 '완승'으로 일단락됐다.법원의 이 같은 판결로 관심이 YS비자금의 실체에 쏠리면서 검찰 수사 여하에 따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법적,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한나라당을 상대로 낸 940억원의 국고환수 소송 전망이 불투명하게 됐다.
항소심 재판부가 자금의 출처를 안기부 예산으로 인정했던 1심 판결을 전면 뒤집은 까닭은 "김 전 대통령에게서 받았다"는 강삼재 전 의원의 새로운 진술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김 전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1993년에 갑자기 안기부 예산 잔고가 급증한 사실을 주목했다. 재판부는 안기부가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각종 사업을 정상적으로 수행했는데도 93년 잔고가 1,293억원이나 급증한 데 대해 "안기부에서 쓰고 남은 예산과 이자"라는 검찰측 주장보다 "외부 자금이 유입돼 안기부 계좌를 통해 관리됐다"는 강씨 변호인측 주장을 인정했다. 94년 잔고가 194억원 증가, 95년 642억원 감소, 96년 380억원 감소한 것과 비교할 때 외부자금 유입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안기부 계좌에서 인출된 자금이 강씨 계좌에 입금되기 직전, 강씨가 청와대를 방문한 사실과 김 전 대통령이 법정에 나와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점도 강씨측에 유리한 정황으로 작용했다.
재판부는 "김 전 대통령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판단해 선거자금을 지원했다"는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의 주장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씨가 1심에서는 "제3자를 통해 강씨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다가 항소심에서 "강씨에게 직접 줬다"고 번복한 것에 대해 재판부는 "더 이상 강씨를 옹호할 경우 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김 전 대통령의 관련 사실이 밝혀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도마뱀이 꼬리를 자른다고 해서 도마뱀의 혐의가 없어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도마뱀이 현장에 있었다는 증거만 될 뿐"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재판부는 또 "김씨가 횡령한 자금이 안기부 예산이라고 하더라도 횡령행위의 성립 시기는 결산보고서를 허위 조작한 때로 보아야 하며, 사후에 이를 인출해 사용한 행위는 별도 횡령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검찰 공소사실의 잘못을 지적해 대법원에서 법리 공방이 예상된다. 이날 판결로 서울중앙지법에 계류중인 관련 민사 소송도 대법원의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정지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나라당은 9개 시·도지부 부동산에 대한 정부의 가압류에 대해서 이의신청을 낼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됐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檢 "YS조사, 최종판결뒤 검토"
안풍 사건 피고인들에게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됨에 따라 재수사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재판부 판단처럼 1996년 15대 총선에서 사용된 940억원의 출처가 안기부 예산이 아니라면 사건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번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벌써 진실규명을 위해 어떤 식이든 YS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검찰은 "이번 판결을 수용할 수 없어 상고하겠다"며 재수사에는 일단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차동민 대검 수사기획관은 "현재 증거만으로 공소유지가 가능하다"면서 "YS 조사도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오면 검토할 문제"라고 비켜갔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 부실에 대한 지적이 있고 새로운 사실도 드러난 만큼 보강조사는 진행될 것이란 전망이다.
검찰은 여전히 자금 출처가 안기부 예산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 돈이 어떤 경로로 강 전 의원에게 전달됐는지는 규명하지 못했다. 일단은 강 전 의원을 상대로 "자금을 청와대 집무실에서 YS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주장의 사실여부를 밝혀야 한다. 대법원에서도 YS 비자금으로 결론이 날 경우 YS를 상대로 자금 출처 조사는 불가피하게 된다. 돈의 출처가 기업 등에서 받은 당선축하금 등의 성격이라면 YS는 공소시효가 남은 뇌물죄(10년)나 조세포탈죄(7년)로 처벌될 수 있다. 대통령은 재임 중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98년 2월 퇴임이후 공소시효가 시작된다. 정치자금법이나 자금세탁방지법, 금융실명제법 위반 등은 당시에 처벌 규정이 없었거나 공소시효가 지났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강삼재 "정의 살아있다"… 김기섭, 굳은 침묵
안풍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 받았다가 5일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강삼재 전 의원과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은 문민정부 시절 '정치적 부자(父子)' '군신관계'라고 불릴 정도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였다. 5선 의원으로 주요 당직을 두루 거친 강씨는 YS가 당 총재였던 시절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으며 김씨 역시 YS의 차남 현철씨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다. 때문에 이 사건 1심 재판 때만 하더라도 김씨가 "강씨는 잘못이 없다"고 옹호하는 등 둘의 관계는 돈독해 보였다.
하지만 항소심에 들어오면서 둘은 적으로 바뀌었다. 발단은 강씨가 "안풍 자금은 YS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폭탄 진술을 하면서부터. 김씨는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밟고 넘어가거나 배신하는 사람치고 잘 되는 사람 못 봤다"며 선공을 펼쳤고 강씨는 "국민과 역사를 배신할 수 없었다"고 맞받았다. 강씨는 이 진술로 항소심 공판에서 일대 전기를 마련했고 이날 선고로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거뒀다.
선고 후 김씨는 무죄를 받았는데도 기쁜 모습은커녕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온 반면, 강씨는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두문불출 YS "…"
김영삼 전대통령측은 5일 안풍(安風) 자금은 사실상 YS 비자금이라는 취지의 판결이 내려지자 또 다시 고집스러운 침묵으로 대응했다. 김 전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은 내내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지난해 9월 안풍이 재연됐을 때나, 올 1월 강삼재 전의원의 폭로성 발언이 터져 나왔을 때보다 곤혹스러움의 강도가 더하다는 반증으로 보였다. YS는 2심 판결 내용을 이날 오전 보고 받았지만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YS는 이후 종일 자택에서 칩거했고, 김기수 비서실장도 휴대폰을 꺼놓은 채 언론 등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지난 총선 이후 YS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알려진 박종웅 전 의원도 상도동 자택을 찾지 않았다. "나와는 무관한 일" 따위의 측근을 통한 최소한의 항변조차 이날은 없었다.
안풍 재점화 이후 YS는 줄곧 언급을 피해왔다. 정치적 아들이라 불렸던 강 전의원이 "안풍 자금은 YS가 준 돈"이라고 폭로했을 때도 YS는 "내가 말 안한다면 안 한다"며 손사래만 쳤었다. 4월 재판부에 보낸 불출석사유서를 통해 "본인은 대통령 재임 중에 그 누구로부터 돈 받은 사실이 없으며 또 누구에게도 돈 준 사실이 없다"고 한 것이 그나마 길었던 해명의 전부였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결이 내려진 지금의 시점은 YS가 침묵만으로 대응하기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쏟아질 도덕적 지탄은 물론이고 검찰 조사 등 사법적 압박이 가해질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박종웅 전의원은 안풍이 논란이 될 때마다 "YS께서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고 답해왔다. 그 말을 뒤집으며 YS가 조만간 입을 열 수도 있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한나라 "사필귀정" 환영 국정원 "대법 판결 남아"
한나라당 이날 판결에 대해 "사필귀정"이라며 일제히 환영했다. 이날 오전 의원총회 도중 김형오 사무총장이 "안풍사건에 대해 법원이 무죄를 선고를 했다"고 알리자 의원들이 박수와 환호로 화답할 정도였다.
박근혜 대표는 "안풍 사건으로 인해 한나라당은 나라 돈을 훔친 도둑이 돼 엄청나게 명예가 깎였다"며 "개인이라면 명예훼손 소송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억울한 심정"이라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김덕룡 원내대표는 "진실이 밝혀져 환영하며 강 전의원의 고통에 대해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마음 고생이 심했던 만큼 분노도 커보였다. 홍준표 의원은 "안풍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국민을 기만하고 한나라당을 음해해온 추악한 정치 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며 "총풍, 병풍, 안풍이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데 대해 국민의 정부뿐만 아니라 이 정권도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오후 강삼재 전 의원은 염창동 한나라당사를 찾아 당직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누명을 벗은 것을 자축했다.
국가정보원 이날 판결에 대해 최대한 말을 아끼며 곤혹스러워 했다. 국정원은 재판 내내 "김기섭 전 운영차장 등이 안기부 자금을 유용한 것이 맞다"고 주장했고, 최근까지 추징금 환수를 위해 한나라당사 가압류까지 추진했었기 때문이다.
국정원 공보관실은 이날 "고등법원의 판결이 확정판결이라고 보기 어렵고 검찰도 상고를 하겠다고 했다"며 "재판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다른 관계자는 "우리는 계속 국고로 생각했는데 법원이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모르겠다"고 당황해 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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