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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바꾸는 올림픽]<1>올림픽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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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바꾸는 올림픽]<1>올림픽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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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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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이제 한달 앞으로 다가온 아테네 올림픽(8월13~29일)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올림픽은 이미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섰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멀리'를 표방하는 올림픽의 이념은 진보를 지향하는 인간의 끝없는 도전 정신과 맞물리면서 사회 각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림픽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0세기 전까지 올림픽은 남성들의 잔치였다. 여성에겐 관람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고대올림픽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인의 축제’를 선포한 근대올림픽마저도 여성을 외면했다.

1896년 1회 아테네올림픽에서 여성은 들러리였다. 근대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 남작조차 “여성의 몫은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걸어주는 일”이라고 못박았을 정도였다. 구경하다 들키면 가혹한 형벌을 내렸던 고대와 달리 관람은 허용한 것이 여성에 대한 유일한 배려였다.

20세기의 문이 열린 1900년 파리에는 “올림픽 여성 참가”를 외치는 에밀 졸라 등 지식인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졌다. 덕분에 파리올림픽은 997명중 22명이 여성으로 채워졌다. 참가종목은 테니스와 골프로 한정됐다.

금녀(禁女)의 무대였던 올림픽에서 첫 금녀(金女)가 된 선수는 이 대회 테니스 단식과 혼합복식에서 우승한 영국의 샤롯데 쿠퍼. 그는 레이스와 주름이 치렁치렁한 긴 치마에 허리를 바짝 졸라맨 양장차림으로 전 경기를 소화했다. 치마길이가 짧아진 것도 장구한 올림픽 역사와 괘를 같이한다.

그나마 1904년 세인트루이스대회에 여자종목은 양궁뿐이었다. 참가선수는 단 6명. 1912년 스톡홀름대회에선 수영이 여성에게 개방됐다. 여자 수영선수를 위해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부풀린 형태의 반바지인 큐롯까지 등장했다.

여성의 올림픽 출전의 전환점은 1928암스테르담대회. 국제여자스포츠연맹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5개의 육상 여자종목을 인정했다. 5개의 여자 세계신기록이 쏟아졌지만 800m가 문제였다. 트랙을 돌던 선수 9명이 실신하는 바람에 여자 800m 선수들은 64년까지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했다.

차별은 여전했다. 32년 로스엔젤레스대회 육상 5종목의 출전티켓을 따낸 미국의 베이브 디드릭슨은 여성은 3종목 이상 출전할 수 없다는 당시 올림픽규정 때문에 3종목에만 참가해 2관왕에 올랐다.

올림픽은 여권운동의 앞마당이기도 했다. 92년 바르셀로나대회에서 조국 알제리에 첫 금메달을 안기며 육상 장거리 2관왕에 오른 알제리의 하시바 불머카가 대표적이다.

그는 “여성이 맨살을 드러내고 짧은 팬츠를 입고 달린다”는 이유로 회교원리주의주의자들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회교국가의 여성들을 위해 뛰겠다”며 트랙을 돌아 회교국가의 여권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여성의 올림픽 참가가 꽃을 피운 것은 ‘여성올림픽 100년’을 맞은 2000시드니올림픽. 300개 세부종목 중 132개(44%) 종목에 여성이 참가했고 여성 비율도 38.20%를 차지했다. ‘남성의 성역’으로 여겨지던 역도와 수구 종목도 여성에게 문을 열었다.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 6명이 모두 여성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한국 여성들 역시 역대 올림픽에서 남자들을 능가하며 남녀평등의식 확산에 기여했다. 박봉식(당시 이화여고ㆍ51년 작고)이 48년 런던올림픽 육상 투원반에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70년대까지 1, 2명이 명맥을 잇던 한국 여성올림픽사는 76년 몬트리올대회에서 여자배구가 구기사상 첫 메달(동메달)을 안기면서 새장을 열었다.

84년 로스엔젤레스대회 여자 양궁에서 첫 금메달을 따낸 이래 시드니올림픽까지 한국의 금메달 46개 중 18개는 여성이 따냈다. 한국여성체육학회 홍양자(이화여대 체육과학대 교수) 회장은 “엘리트 여성 선수의 올림픽 활약이 학교체육 생활체육 등 국내 여성체육 전반뿐 아니라 여권신장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근대올림픽은 108년의 기나긴 세월을 지나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는 여신 아테나에게 헌정된 도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아테네대회는 44%가 여성선수로 채워진다”고 전망했다. 아테네는 여성 레슬링을 허락했다. 여성을 환영하지 않는 종목은 이제 복싱뿐이다.

“스포츠는 평등하다”는 대의는 올림픽 무대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정열을 불살랐던 여성 스스로 일궜다. 바야흐로 올림픽이 진정한 “세계인의 축제"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올림픽을 빛낸 여성 스타

“내가 한 일은 빨리 달리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것 때문에 열광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194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기적의 엄마”로 불린 화니 코엔(네덜란드)의 말이다. 육상선수로는 적령기를 지난 30세의 주부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는 당시 100m(11초2ㆍ올림픽 신기록), 80m허들(11초 2ㆍ올림픽 신기록), 200m(24초4), 400m계주 등 4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108년 올림픽 역사에서 남성 못지않은 기량으로 올림픽을 빛낸 걸출한 ‘화니’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놀라운 경기력과 접목시켜 스포츠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우선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원조 체조요정’ 라리사 라티니나(구소련)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전례 없는 고난도 연기를 펼치며 마루, 뜀틀, 개인종합 부문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64년 도쿄올림픽 때까지 모두 9개의 금메달을 획득, 체조경기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미국의 남자 육상 선수였던 칼 루이스 등과 함께 역대 개인 통산 최다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76년 몬트리올에서는 15세의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가 더욱 놀라운 사건을 만들었다. 153㎝, 39㎏ 의 자그만 체구에 인형처럼 예쁜 외모를 지닌 그는 2단 평행봉 만점을 시작으로 무례 7차례나 만점 행진을 벌이며 3관왕에 올랐다.

6살 때 체조에 입문, 하루 5시간 이상 훈련을 거듭해 이뤄낸 쾌거였다. 코마네치의 만점 획득은 체조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예술의 경지로 승화했음을 알린 혁명이었다. 그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도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 2개를 추가했다.

88서울올림픽 여자육상 3관왕에 오른 ‘트랙의 패션 모델’ 그리피스 조이너(1959~1998)도 스포츠 팬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경기 때마다 화려한 유니폼으로 등장, 세련된 패션감각을 과시했던 그는 질풍처럼 트랙을 질주, 양팔을 번쩍 들고 결승선을 통과한 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인상적인 뒤풀이를 펼쳤다. 당시 여자 육상 200m에서 그가 세운 21초34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밖에 ‘인어’ 제니 톰슨(미국)도 3차례나 올림픽에 출전,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1992년 바르셀로나, 1996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잇따라 나서 모두 수영 계영 종목에서만 7관왕에 등극, 크리스틴 오토(구 동독)가 88올림픽 때 세운 최다금메달(6개) 기록을 깼다.

/박진용기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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