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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게 무너진다]<상>벼랑 끝에 선 영세상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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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게 무너진다]<상>벼랑 끝에 선 영세상인들

입력
2004.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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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 까먹은 '깡통상가' 속출"하루라도 빨리 장사를 그만두고 싶은데 점포마저 안 나가요."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한민자(54·여)씨는 올들어 밀린 점포 임대료와 인건비를 카드 3장으로 돌려 막으며 간신히 버티고 있다. 최근 고용 미용사를 내보내고 혼자 가게를 꾸리고 있지만 한 달에 60만원 만지기도 힘들다. 1년 6개월 동안 쉬는 날도 없이 일했으나, 남은 것이라고는 가게 임대를 위해 은행서 빌린 4,500만원과 눈덩이처럼 불어난 카드 이자 등 8,000만원의 빚뿐이다.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운영하던 호프집을 최근 중개업소에 매물로 내놓은 장경수(47)씨는 "올들어 매출이 절반까지 떨어져 4개월째 관리비와 임대료를 은행 대출로 해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웃 옷가게는 급한 김에 고리 사채를 빌려 썼다가 이혼 위기에 놓여 있다"며 "우리 같은 동네 상인들은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갈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하소연했다.

동네 가게가 몰락하고 있다. 내수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음식점과 슈퍼마켓, 이·미용실, 옷가게는 물론, 노래방과 당구장, PC방, 심지어 대형 찜질방까지 업종을 가릴 것 없이 매출이 급감해 아예 영업을 포기하는 극한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음식점과 주점이 몰려있는 서울 종로구의 경우 올들어 6월말까지 435개 점포가 문을 닫아 지난해 같은 기간(358건)보다 22% 늘었다. 그나마 경기를 덜 탄다는 강남구도 폐업 점포가 작년보다 10% 이상 증가했다.

서울 소공동이나 남대문로 지하상가에는 상당수 점포가 '폐업정리' '점포정리 세일'을 걸어놓고 있지만 고객의 발길이 끊겨 썰렁하다. 부동산중개업소에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보증금까지 까먹은 이른바 '깡통 상가'나 권리금이 한푼도 없는 상가 매물이 수북하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월드공인중개소 박영주(47)씨는 "현재 의뢰된 점포 매물 100여건 중에는 영업도 하지 않으면서 '생돈 임대료'를 내는 가게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한국소기업소상공업학회 정범식(숭실대) 교수는 "조기퇴직자 증가와 취업난 등으로 자영업 비중(48.9%)이 지나치게 높아 경쟁이 치열한데다 내수 불황마저 지속되면서 동네 영세상들이 한계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며 "동네 가게의 몰락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제2의 신용대란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간판 세번 바꿨지만 빚만 불어나…"

서울 왕십리에서 삼겹살·주꾸미집을 낸 진성례(64)씨는 대뜸 "3재(災)가 씌었다"며 텅 빈 음식점 홀을 가리켰다. 노후 자금을 끌어 모아 2년 전 갈비집을 냈지만 광우병 파동으로 9개월 만에 문을 닫았고, 메뉴를 바꾼 유황오리집도 조류독감으로 업체들이 줄도산하면서 주저앉았다. 지난 3월 3번째 간판을 바꾼 진씨는 "손님이 없어 최근 10명이 넘던 종업원을 4명으로 줄였지만 300만원이 넘는 임대료와 은행 이자를 내고 나면 매달 적자"라며 "없던 빚이 6,400만원으로 불어나 상환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경기 부천 상동신도시. 아파트단지로 연결된 4차선 도로를 따라 즐비한 상가 건물마다 음식점과 주점 간판이 휘황찬란하다. 그러나 한 발짝만 돌아 들어가면 2∼3층은 물론 1층에도 텅 빈 점포가 수두룩하다. "지난해 상가 건물이 처음 들어설 때 앞 다퉈 개업했던 가게들이 올 들어 적자를 견디지 못해 속속 문을 닫고 있다"는 게 인근 부동산중개업소의 설명이다.

장기 불황의 그림자는 퇴직자들의 생계형 창업 1순위로 꼽히던 먹는 장사에까지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올 들어 음식업계 전체가 사실상 공황상태에 빠졌고, 생계형 사업자의 30% 이상이 폐업 위기에 몰렸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지방이나 도시 변두리는 물론 잘 나간다는 상권도 예외는 아니다. 신촌 이화여대 앞에서 분식집을 하는 박형권(43)씨는 "배달 매출이 70% 가까이 줄어 한 명뿐인 종업원 인건비마저 매월 20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줄였다"며 "최근 식재료값이 20∼30%나 뛰어올라 원가에 맞추려면 그만큼 가격을 올려야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손님이 완전히 끊길지 몰라 물가상승 부담을 전부 떠안고 있다"고 말했다.

옷과 구두 등 패션류 도·소매나 숙박업 등 다른 자영업도 상황은 마찬가지. 서울 명동 지하상가에서 구두점을 운영하는 장수형(38)씨는 "지난해만 해도 하루 40켤레는 팔았으나, 최근 명동지역에 대형 패션몰이 잇따라 생기면서 지금은 1만원 떨이세일을 내걸어도 10켤레 팔기가 힘들다"고 했다. 남대문에서 아동복 가게를 경영하는 전범춘(47)씨는 "인건비 아끼려 종업원 내보내고 부부가 장사하고 있지만, 지방 도매상의 발길이 끊겨 개점휴업 상태"라며 "은행마저 대출금 반환을 독촉하고 있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고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음식점 미용실 슈퍼마켓 등 전통적인 동네 영세상의 몰락은 돈 있는 사람들조차 지갑을 닫을 정도로 경기가 안 좋은 탓도 있지만, 취업이 어려워 경쟁적으로 창업전선에 나서다 보니 수익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도 원인이다. 정부집계 결과 우리나라의 음식점 수는 56만여개로 인구 100명당 1곳꼴이다. 작년 한해 서울에서만 3만여개의 음식점이 새로 생겼다.

한국음식업중앙회 최노석 정책기획실장은 "불황기에는 '먹는 장사가 최고'라는 인식에 창업자들이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동네마다 음식점이 넘쳐난다"며 "지난해 육류 파동으로 휘청이더니 올해는 내수부진에다 불량 만두 파동이 겹쳐 완전 빈사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동서대 정수원 교수는 "자영업자 수가 너무 많은 게 '영세상인 대란'의 핵심"이라며 "영세 상인의 몰락을 막으려면 자영업자에 대한 금융·세제 혜택과 함께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통해 취업 인구를 흡수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신기해기자 shink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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