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발발 얼마 뒤인 1950년 7월5일 밤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 1백20여 명이 인근 야산으로 끌려 나와 집단적으로 총살당했다. 경찰이 퇴각을 앞두고 사살한 이들 죄수 가운데는 장재성이라는 42세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해방 뒤 민주주의민족전선 전남 지부를 이끌며 남북을 오가다가 1948년 검거돼 징역 7년형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장재성은 도쿄(東京) 주오대학(中央大學) 예과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상경과를 졸업한 인텔리 공산주의자였다. 일제 시대부터 좌익 활동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명망가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그의 이름 석 자는 후미진 곳에 박혀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일제하의 가장 큰 민족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광주학생운동에 깊숙하고 또렷하게 연루돼 있다. 광주고보 재학 중이던 1926년에 그가 주동해 만든 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와 그 후신인 독서회 중앙본부는 1920년대 말 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에 항거하는 사회주의적 색채의 동맹휴학을 호남 지역에서 여러 차례 조직했고, 이렇게 축적된 운동 경험은 1929년 11월 점화한 광주학생운동의 연료가 되었다.
우연히도 장재성이 성진회를 결성한 지 꼭 세 해째 되는 날 불이 붙은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퍼져나간 데는 신간회 광주지부와 독서회 중앙본부를 비롯한 진보적 청년·사회 단체들의 역할이 컸다. 11월3일의 1차 시위 이후 장재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학생투쟁지도본부'는 11월12일 제2차 시위를 조직함으로써 항일 투쟁의 운동량을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이 2차 시위를 징검돌 삼아 광주학생운동은 서울로, 전국으로 번졌다. 장재성은 1962년 정부의 건국공로훈장 수여 대상에 당초 포함되었다가 그의 좌익 활동이 문제돼 막판에 제외되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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