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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13>'기적의 소녀' 구한 소방관 이영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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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13>'기적의 소녀' 구한 소방관 이영주씨

입력
2004.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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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2일 오후 8시 27분. MBC 개국 11주년 기념 '남녀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린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본관과 10층 옥탑으로 이뤄진 건물 전체는 사람들이 창문에 매달려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말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당시 나는 소방서 인명구조특공대원으로 현장에 도착해 동분서주하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안타까운 외침을 들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쌍갈래로 머리를 딴 가녀린 소녀가 창틀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3층 창문 쇠창틀에 왼쪽 허벅지가 끼어 있었고 시커먼 연기는 금방이라도 그 소녀를 빨아들일 듯 휘감고 있었다.

이 시기에 처음 도입된 고가사다리차를 수십 차례의 시도 끝에 건물벽에 바짝 접근시켰다. 나는 사다리 바스켓에 올라 타 소녀가 떨어질지 모를 위치에 바싹 붙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소녀는 내 발등에 떨어졌고 그 순간 함께 떨어져내린 소나기 유리파편과 쇠창틀을 겨우 몸으로 막아냈다. 조수아(당시 6세)양은 이 일로 아직까지 '기적의 소녀' 로 기억되고 있다.

불과 5분 정도의 아찔하고 짧은 순간이 한국일보 사진부 박태홍 기자에게 포착된 것을 안 것은 수아 양이 매달려 있는 사진이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게재되고 나서다. 계엄령 하의 엄격한 보도통제로 국내 신문에 실리지 못했던 이 사진은 AP통신을 통해 해외로 보내져 요미우리, 아사히 등 외지에만 보도됐다. 일본 독자들로부터 "이 소녀가 과연 살아났느냐" "어떻게 살았느냐" "구출한 사람이 누구냐"는 문의가 국내에 빗발쳤다.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 입원한 수아의 병실엔 국내외의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투옥 중이던 김희로씨의 위로편지와 함께 일본 독자들의 위문편지가 입원 기간인 75일 동안 거의 매일 배달됐고 일부 일본인들은 훗날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이 사진은 세계보도사진전 은상과 한국기자상을 받았고 세 사람은 32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족의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화재 현장에서 부상해 입원 중일 때 고등학생이 된 수아가 한아름의 꽃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온 적이 있다. 이날 함께 방문한 한국일보 문화부 김훈 기자(현 소설가)가 내게 퉁명스럽게 "글을 써 봐라. 긴장, 흥분, 희열은 충분한 예술적 소재가 된다"고 말했다. 그 한 마디를 계기로 나는 최초의 소방논픽션인 '서울타워링'을 출간했고 10만부 이상 팔려 추천문인으로 문인협회에 등록돼 이후 소설가의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나는 수아의 운명적인 후견인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으려 애썼다. 1989년에는 수아 양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나는 2002년 62세로 정년퇴직했다. 전쟁보다 더 처절한 화재 현장에서 20여 차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고 6차례나 병원에 장기입원하면서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나에게 진정한 '불밥 인생'을 눈뜨게 해 준 박태홍 기자와 한국일보와의 인연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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