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매하신 독자 여러분! 27년 전인 1977년 8월20일 명동 ‘창고극장’에서 올린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에서 여러분께 첫 인사를 드렸던 피이터입니다. 배우 추송웅이 자신의 연기 데뷔 15주년을 맞이 해 모노드라마로 만든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사실 제 출생은 아프리카 어디 쯤으로 추정되는 ‘황금 해안’이지만 여러분께 퍽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제 국적을 한국으로 아시는 분이 많을 줄 압니다. 게다가 정신적인 아버지는 체코에서 태어난 유대계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이니 저도 제 국적이 아리송합니다. 카프카의 ‘시골의사’(1919)라는 단편집에 있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라는 원숭이가 주인공인 황당한 작품이 제 출생증명서가 되겠습니다. 1962년 베를린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주간한국’에서 이 소식을 읽은 추송웅이 욕심을 내면서 저는 여러분의 ‘피이터’가 됐습니다.
간단히 제가 살아온 여정을 소개한다면 이렇습니다. 무리에 섞여 물을 마시러 갔다가 숲에서 매복하고 있던 하겐벡 회사의 사냥 원정대에 붙잡혔습니다. 뺨에 한 방을 맞는 바람에 붉은 흉터가 생겨 ‘빠알간 피이터’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의 폭력성이 제 몸에 남긴 흉터의 색깔이 바로 제 이름이 된 것이죠.
총을 맞은 뒤 깨어보니 증기선 갑판 위의 우리 안이었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출구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는 절망했습니다. 출구 없이 살 수는 없으니까요. 거창하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1977년부터 추송웅씨가 1985년 죽을 때까지 482회의 공연을 하며 15만2,000명의 관객을 모은 것은 군사독재의 암울하고 출구 없는 상황이 제 처지와 비슷해서 였을 것입니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 문의 자물쇠를 물어 뜯고 탈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달아나봐야 어쩔 수 없다는 좌절감을 저는 직선적으로 내뱉었고, 사람들은 제게 열광했습니다. 모두들 갑갑하게 내리누르던 시대의 공기를 피해 제게로 다가왔습니다. 명동 ‘창고극장’에서 명동성모병원까지 길게 이어진 관객들에게 미안해 하루에 네 차례나 무대에 선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의 눈물과 웃음을 함께 하며 출구 없는 상황을 잠시 잊을 수 있었습니다.
추송웅씨의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부인의 곗돈 75만원을 부어 시작, 혼자서 기획부터 연출 및 장치까지 1인5역을 하며 무리를 했죠. 6개월간 창경원에 출근하며 원숭이 우리를 지켜봤고 심지어 허락을 받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으니까요. 언론이 앞 다투어 공연을 조명하면서 상업연극 시비도 일었습니다.
‘연극계 유일한 스타’라는 선정적인 미디어의 호들갑도 있었죠. 공연한 지 보름만에 예매표 1만장이 팔린 데는 또 다른 요인도 있습니다. 추송웅씨의 얘기를 빌자면 “당시는 젊은이들의 광장이 없는 쓸쓸한 풍경”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문화적 출구가 없었으니 소설가 최인호의 말대로 “관객은 비밀집회에 모인 신도들” 같았던 거죠.
거기에 기계체조며 그네와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거리고 바나나와 포도를 먹고 소주도 기울일 줄 알아서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함부르크에서 첫번째 조련사에게 넘겨졌을 때, 저는 제게 열려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알았습니다. 동물원 아니면 서커스극장이었습니다. 저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있는 힘을 다 해 서커스극장으로 가야지. 그것이 출구다.”
그러나 저와 추송웅씨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들어가면서 피이터의 전성시대는 막이 내리고 말았습니다. 배우 혼자서 모든 걸 다 떠맡아야 하는 모노드라마의 특성상 매너리즘은 빠졌고 카프카적 세계와 서커스 쇼의 세계 사이에서 ‘빠알간 피이터’는 휘청거렸습니다.
추송웅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최근까지 배우 손성권, 권혁풍, 장두이 등이 ‘피이터’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구 없는’ 시대가 오더라도 다시 똑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지도 않겠습니다. 연극이 유일한 출구이던 시대는 지나갔으니까요.
/이종도기자 ecri@hk.co.kr
■그때 한국일보에는/"모노드라마 이례적 대성황"
‘빠알간 피이터…’가 초연되던 당시 연극평단에서는 이 작품을 상업연극이라 몰아 부쳤다. 하지만 한국일보는 ‘대성황’ ‘연극계 충격’ ‘모노드라마 1인자’ 등이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1977년 8월22일자 기사는 ‘모노드라머 ‘빠알간 피이터’ 이례의 대성황’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추송웅을 ‘가장 집요하게 연극무대를 지켜온 배우’로 꼽으며 ‘평균 100명의 관객이면 만원이라 할 수 있는 창고극장의 객석은 초만원이었고, 무대 위에도 관객이 좁은 연기공간만을 남겨 놓고 관객이 꽉 들어찬 상태’였다고 보도했다.
1985년 5월8일 ‘모노드라마 1,000회 돌파’라는 기사는 ‘빠알간 피이터…’에 대해 “문학성보다는 극적 재미와 운동을 가미, 갖가지 재주와 운동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도쿄와 대만 공연에서 ‘환상적인 문화적 충격’이란 평을 들었으며 예상 외 흥행을 거두었다고 적었다. 구희서기자는 1985년 12월31자 부고 기사에서 “그가 ‘진정 우리들의 광대’로 무대에서 뛰다 갔다”고 추모했다.
■'빠알간 피이터…' 열연 故추송웅 세자녀 배우길 걸어/상욱·상록·상미 배우활약
영광이자 부담. 고(故) 추송웅(1941~1985)의 세 자녀 상욱(35), 상록(33), 상미(31)는 모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에게 신화적인 아버지의 존재는 어디를 가도 따라다니는 후광이자 짐이다.
세 남매 중에는 둘째 상록이 가장 먼저 배우가 됐다. ‘무대에 선 아버지의 강렬한 눈빛’에 이끌려 배우의 길을 갔다고 한다. “아버지의 열정과 광기를 보면서 자라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같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 이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후광이 싫을 때도 있다. 배우가 아닌 누구의 아들로 기억된다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니다.”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 상록은 여의도 고교 시절부터 록밴드를 이끄는 등 재주를 보였고 1989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 부친의 30년 후배가 됐다. 추송웅의 모노 드라마 ‘우리들의 광대’와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을 수십 번 반복해서 볼 정도로 아버지의 열혈 팬이었던 그는 최근 막을 내린 뮤지컬 ‘판타스틱스’에서 부친이 열연한 엘가로 역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국내 초연하신 작품이라 꼭 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따라 가긴 아직 멀었지만.” 3일부터 11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드러머 강수 역이다. “앨범을 두 장이나 낼 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고 뮤지컬에도 매력을 느낀다.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정극도 하고 싶고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을 아버지가 하신 그대로 모노드라마로 올려 아버지께 헌정하고 싶다.”
1994년 연극 ‘로리타’로 데뷔한 막내 추상미도 작은 오빠 못지않게 다방면에서 활약중이다. 고교시절 밴드의 리드 싱어를 하기도 한 그는 ‘꽃잎’에서 단역으로 시작, 영화 ‘생활의 발견’과 ‘미소’, 드라마 ‘노란 손수건’에 출연했고 지난 해에는 연극‘프루프’ 등으로 무대에 섰다. 최근 찍은 ‘누구나 비밀은 있다’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맏이 상욱은 뒤늦게 동생들의 대열에 동참했다. 지난 해에 뮤지컬 ‘콜링 유’로 데뷔를 했고 9일부터 ‘화성의 방’이라는 연극에 출연할 예정이다. 홍대 앞에서 부친이 운영하던 극장의 이름을 딴 복합문화공간 ‘떼아트르 추’를 꾸리고 있다. 이들 세 남매는 내년 부친의 20주기를 맞아 창작극, 창작뮤지컬, 모노극 페스티벌도 올릴 계획이다.
이종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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