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대북 사업을 추진하던 재벌 총수가 검찰 수사를 받던 중 폭풍이 거세던 여름날 밤, 본사 빌딩 집무실을 찾는다. ‘유미 엄마’와 ‘박대석 사장’ 앞으로 유서 2통을 남긴 그는 평소 착용했던 시계와 안경을 벗고 반개폐식 창문으로 뛰어내린다. 새벽녘 청소를 하던 용역회사 직원이 빌딩 주차장 근처 화단에서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5일부터 방영되는 MBC 월화드라마 ‘영웅시대’(극복 이환경ㆍ연출 소원영)의 첫 회 내용이다. 세기 그룹의 ‘천사국’이란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2003년 8월 4일 한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던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의 자살 사건을 다큐멘터리처럼 정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천사국 회장 역을 맡은 김갑수는 정몽헌 의장의 걸음걸이와 얼굴 표정을 흡사하게 흉내냈다.
‘영웅시대’ 2회에 등장하는 천사국 회장의 아버지 천태산(최불암)이 소떼를 몰고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장면에서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당시 뉴스 자료 화면까지 사용했다. 천태산의 어린 시절 이야기 즉 집을 뛰쳐나와 광산 노동자로 일하다 아버지에게 붙잡히는 장면은 정 명예회장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나온 내용과 판박이다.
26, 27일 잇따라 열린 ‘영웅시대’ 시사회에서는 다큐인지 픽션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모델로 한 천태산,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모델로 한 국태호 두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는데 예상보다 훨씬 사실적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1회분 무료 상영이 이뤄지고 있는 MBC ‘영웅시대’ 홈페이지에는 “과연 정주영, 이병철이 영웅 칭호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는지 의문”이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이에 대해 연출을 맡은 소원영 PD는 “처음부터 정 명예회장, 이 회장을 모델로 하되 이에 픽션을 가미하겠다고 밝혔다”면서 “‘영웅시대’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일 뿐”이라고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또 “재벌가 집안 이야기를 가십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한국 경제사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 계획이며 이미 삼성, 현대로부터 양해를 얻었다”고 말했다.
삼성 관계자는 “시사회는 보지 않았지만 시놉시스상 큰 무리는 없었다”며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픽션이 중심이 되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현대측도 “현재로는 어쩔 수 없는 상태로 덤덤히 지켜 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청년기를 넘어 그룹 총수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문제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역대 정권과의 뿌리 깊은 유착을 통한 성장, 복잡한 사생활, 후계 구도를 둘러싼 비극과 첨예한 갈등 등 민감한 부분을 다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시사회에서 공개된 것처럼 주인공들의 영광과 위업만이 두드러질 경우 재벌을 미화한다는 비판을 비껴가기 어렵고 그림자를 조명한다면 해당 기업의 반발을 사게 될게 뻔하다. 실제 ‘왕자의 난’이 부정적으로 묘사될 것을 우려 현대자동차와 현대 중공업 관계자들이 ‘영웅시대’의 작가인 이환경씨와 MBC 측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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