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발끈했다. 그는 6월27일 언론사 정치부장단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외교부가 김선일씨 피랍에 관한 진실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젠 국민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항변을 제기했다고 한다. 반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언론에 의해 한 측면만 부각됐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외교부의 전반적인 자세와 생각이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반 장관은 우선 "내가 범법자도 아닌데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 있는 사람 대하듯 한다"라며 사진기자들의 공세적 취재를 문제 삼았다. 그는 일국의 외교와 통상을 책임지는 수장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망각한 듯하다.
사진은 범법자만 찍히는 것이 아니다. 반 장관이 공직 생활 35년 동안 많은 보직을 거쳤지만 지금만큼 비중 있고 국가적으로 큰 일을 좌우하는 정책결정자의 위치에 있었던 적은 없었다. 당연히 일거수일투족이 항상 언론의 관심이 되고 그 만큼 사진도 자주 실린다. 뿐만 아니라 김선일씨 피랍 은폐의혹 사건에 대해 감사원이 조사하고 있으며, 결과에 따라 부처 최고책임자로서 관리책임을 질 것인지 여부가 결정된다. 그는 범법 여부를 스스로 판단할 상황에 있지 않다.
반 장관은 또 "이런 일이 터진다고 장관을 바꾸면 언제 외교를 하느냐. 몇 달마다 장관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김씨 피살사건이 '이런 일' 정도의 가벼운 문제로 보이는가 보다. 정부의 기본 책무인 '국민 생명보호'조차 소홀히 한 외교부가 다른 무슨 외교를 하겠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이미지는 장관이 자주 바뀌어서가 아니라 외교부가 최소한의 의무도 망각하고 치명적 실책을 은폐하려고 기도한 데 있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반 장관은 "미국은 국민 2명이 참수되었는데도 국무부에 항의전화 한 통이 없었다"라고 했다. 이것은 문제의 본질을 오도한 발언이다. 김선일씨가 길에서 불의의 습격을 당했다면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외교부를 질책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추가파병을 앞둔 비상시기에 김선일씨가 생명의 공포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외국 유수의 언론사가 이름을 들이대며 문의한 것까지 가볍게 깔아뭉개는 직원들의 직무유기와 그것이 웅변하는 조직문화에 있다.
반 장관은 또한 "자꾸 한국 언론이 대서특필을 하고, 이라크 추가파병 철회논의가 있는 것만으로도 테러범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언론의 보도행태를 꼬집었다. 그러나 신문이 대서특필하게 된 원인은 외교부가 스스로 자초했다. 그리고 이라크 추가 파병에 대한 논란은 테러범들 때문에 갑자기 돌발한 것이 아니다.
반 장관의 이런저런 발언들은 그 개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외교부, 더 나아가 이 정부의 전반적 기류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간담회 대화 내용을 보면서 아직도 외교부 개혁은 요원한 문제라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헌법 제2조 2항은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900여 명의 외교 인력이 129개 국 600만 명의 교민을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외교부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외교관, 그리고 외교부의 기본 자세와 비상시의 조직적 대응력에 있다.
인력 확충을 주장하기에 앞서 우리 외교관들은 얼마만큼 투철한 헌법정신과 사명감을 가지고 외교활동을 하고 있는지 한 번쯤 자문해 보았으면 한다.
/이용중 동국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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