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신화정재서 지음
황금부엉이 발행ㆍ1만2,800원
중국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지인 지안(集安)의 오회분 4호묘 벽화에는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반인반수(半人半獸)가 등장한다. 정체는 염제(炎帝) 신농(神農)이다. 동이족이 숭배했으며 농업을 관장한 신이므로, 서양신화의 반인반수처럼 ‘괴물’은 아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이’ ‘운우지정’ 같이 우리가 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도 각각 서왕모, 무산신녀 등 중국 신화에서 나왔다.
그리스ㆍ 로마 신화 열풍이 하도 거세다 보니, 신화는 올림포스산에서 제우스와 그 일당이 연출하는 기기묘묘한 사건과 동의어처럼 돼버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세례를 받은 아이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우리의 신화는? 동양의 신화는?
‘산해경 역주’ ‘불사의 신화와 사상’ 등을 내며 일찍이 동아시아 신화연구에 몰두해온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의 이 책은 동양 신화가 얼마나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인지 잘 보여준다.
혼돈의 세상에 질서를 잡은 거인 반고부터 신들의 제왕인 황제, 불굴의 영웅 치우, 건국 영웅의 조력자인 강태공까지 이야기들은 현란하면서도 흥미롭기 그지 없다. ‘신화 편식’에 대한 반발로 한국 신화나 동아시아 신화를 소개한 책이 더러 나와 있지만, 이 만큼 쉽고 재미나게 중국신화 전체를 소개한 책은 찾기 힘들다.
저자는 신화 속의 캐릭터와 사건을 중심으로 중국 신화와 서양 신화가 얼마나 비슷하고 또 다른지, 우리 신화와는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 밝힌다. 또 신화 자체로만 한정하지 않고 중국의 역대 고전에서 신화의 상상력이 어떤 식으로 변주되어 나타나는지 종횡무진 설명한다.
창세의 과정, 신들의 성격과 역할, 그들 사이의 사랑과 갈등 등 이야기만으로도 물론 흥미진진하지만 눈길이 가는 것은 역시 중국의 신화를 그리스ㆍ 로마 신화나 히브리 신화 등과 비교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천지창조의 방식은 동서양이 유사하지만 동양의 신화는 절대적인 창조주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창세기의 야훼와 달리 회남자에 나오는 창조의 신은 자신들도 혼돈에서 태어난 자연의 산물이다.
1만8,000년의 잠에서 깨어나 혼돈의 알을 깨고 천지를 개벽한 태초의 거인 반고는 죽어서 자연스레 바람이 되고 숲이 되지만, 서양 신화에서는 다른 신에게 살해 당한 뒤 신체 각 부위가 절단된 뒤 부분부분이 세상의 일부가 되는 식이다.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다르다. 창세기의 창조 신화는 하나님이 곡식과 날짐승, 길짐승을 닷새에 걸쳐 만들고 마지막 엿새에 사람을 만든다. 모든 창조는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며 인간으로 집중된다.
이와 달리 ‘가부장제에 오염되지 않은 여성성’의 근원인 여신 여와는 가축 다음에 인간을 만들고 그 이후 곡식을 만든다.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에 우열이 없고, 종속 개념은 더더구나 없다. 신화의 단골 메뉴 중 하나인 홍수도 중국에서는 신들의 다툼으로 생겨나거나 자연재해이지만 서양에서는 인간에 대한 징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신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보기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저자는 동양의 신화를 통해 “우리 문화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저자가 2002년부터 1년간 한국일보에 연재한 ‘동양의 신화’를 바탕으로 썼으며, 2권도 7월 중에 출간될 예정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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