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만화를 장르적으로 통칭하는 용어인 순정만화는 순정 어린 미소녀들의 사랑 이야기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비천무’ 같은 감성 넘치는 대하사극이 순정만화이고, ‘리니지’ 같은 판타지도 순정만화다.‘오월의 공원’ 같은 아련한 사이버펑크가 있는가 하면, ‘오디션’ 같은 발랄한 성장드라마도 있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선 순정만화는 따뜻한 모성(母性)에서 비롯된 여성성으로 세상의 모든 아침을 열고, 모든 밤을 품으려 한다. 그러므로 여성성으로 바라보는 순정만화 속 세상풍경은 대립하고 맞서며 승부를 고집하는 남성만화의 살풍경과 반대편에 자리한다.
젊은 여성작가군의 선두주자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는 여성적인 세심한 감성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곳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이상향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 만화이다.
호텔 아프리카는 미혼모인 아델라이드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꼬마 앨비스가 운영하는 작은 호텔의 이름이다.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장사와는 담을 쌓은 듯 보이는 호텔. 게다가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로부터 도피해 온 사람들이다.
개인이 뛰어넘기에는 너무 높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 극복할 수 없는 신체적 장애,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가정불화로부터 달아나 만신창이가 되어 찾아온 투숙객들을 조용히 보듬어주는 곳이다.
흑인이건 백인이건, 잘 살건 못 살건, 그저 따뜻한 가슴만을 지닌 그런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곳. 호텔 아프리카는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물며 안식하길 원하는 이상향의 상징이다. 논쟁하거나 다투지 않고, 그저 나지막하게 자신의 사연을 전하는 캐릭터들만으로 인간의 외로움과 상처를 보듬어안는 이 만화는 순정만화의 여성성이 얼마나 푸근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즈음, 원치 않았고 책임져서도 안될 부정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소중한 우리 이웃이 희생되고 말았다. 저열한 마초 근성에 불과한 전쟁의 남성성은 도무지 대화와 화해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희생된 생명을 볼모로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 참전하자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폭주하는 남성성의 구원은 여성성의 위대한 모성으로만 가능한 것일까. 나는 세상물정 어두운 보잘 것 없는 개인이지만, 이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분들께 만화 속 대사 한 구절을 드릴 자격은 있을 것 같다.
“국민들이 대의를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전쟁을 선포한 당신들은 어디 있었나요? 당신의 가족들은 어디 있었나요?” 우리 순정만화는 아니지만, ‘은하영웅전설’ 중에서 평민대표 의원 제시카가 던진 질문이다.
박군/만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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