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둘 다 이라크 딜레마에 빠졌다. 서로 코드가 전혀 다른 두 지도자가 이라크사태의 악화로 동병상련을 앓고 있는 형국이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자기를 권력의 정상 위에 올려놓았던 정치코드 때문에 시련의 앞날을 맞고 있는 것 같다.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코드는 진보와 참여로 대변되는 '386'이고, 부시의 코드는 신보수주의, 즉 '네오콘'이다. 386은 국내정치의 기존 관행과 질서를 깡그리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기득권체제의 개혁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 수평적 한미관계 정립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네오콘은 9·11사태를 계기로 악의 축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겠다며 동맹국의 반대와 문명충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11월 선거를 앞둔 부시 대통령은 위기에 놓여있다. 작년 바그다드를 함락시켰을 때만 해도 그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으나, 지금은 이라크침공이 잘못됐다는 국민여론 앞에 서 있다. 전쟁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도 찾지 못했고, 아그라이브 포로학대사건으로 국제사회의 도덕적 비난과 저항세력에 의한 미군희생자의 증가로 미국인들은 베트남의 악몽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재선가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며 13년 전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고 낙선한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라크 저항단체의 김선일씨 참수로 노 대통령도 큰 곤경에 직면하게 됐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지도자라는 비판은 오히려 일시적일지 모른다. 문제는 상당한 무게를 지닌 파병반대 여론과 민노총까지 가세하면서 거세지는 파병반대 및 철회 시위이다. 탄핵정국을 탈출하면서 여대야소의 힘마저 얻은 노 대통령이 모처럼 개혁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는 참에 큰 장애물이 뜻밖에 빨리 다가오고 만 것이다.
더 큰 우려는 오히려 자이툰부대를 이라크로 보낸 후에 일어날 상황이다. 파병부대의 안전은 물론이려니와 중동지역 교민과 공관이 테러의 목표가 될 위험은 훨씬 높아진다. 개인적 활동을 하다 피살된 김씨의 죽음을 놓고도 국민감정이 이렇게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판인데, 제2 및 제3의 김선일씨 사건이 일어나거나 파병부대가 공격을 받아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촛불시위는 참여정부를 만들고 지킨 등대나 다름없다. 미군장갑차에 의해 숨진 미선·효순이를 애도하는 촛불시위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점화되었고, 지난 봄 탄핵규탄 촛불시위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노 대통령을 구출했다. 촛불시위는 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변화의 기폭제였다. 촛불시위는 386코드의 또 다른 상징이다. 그러나 그 촛불시위가 파병철회와, 더 나아가 반미시위로 크게 번진다면 노 대통령의 코드정치의 딜레마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정부가 한미동맹차원에서 최소한 지켜야 한다고 설정한 마지노선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씨가 참수된 것이 확인된 후 노 대통령이 서둘러서 파병결정에 변함이 없음을 천명한 담화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을 서둘러 차단하고 싶었던 심정의 발로였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안보는 친미냐 반미냐의 논쟁을 떠나 국가의 미래와 안위가 걸린 중요한 문제이며, 그 핵심에 한미관계의 관리가 자리잡고 있다. 특히 북핵문제의 폭발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현실이다. 인간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수평적인 국제관계는 없다. 그러나 힘이 커지고 전략개발에 노력할수록 협상력이 높아진다. 최근 북핵협상이 이를 보여준다.
외교안보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보를 갖고 국가를 이끌어나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다. 안보에서 만큼은 대통령이 리더십을 명확히 하고 유능한 전문가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김수종 주필 s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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