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의 철인 탈레스는 만물을 물로 보았고, '백경'의 저자인 멜빌은 책의 첫머리에서 "물과 명상은 부부 관계"나 다름없다 했으니 "물에 대한 명상"이란 제목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듯 싶다. 엊그제만 해도 지난 주 내린 폭우로 연구실 아래를 지나는 황룡강이 온통 흙탕물이 되어 온몸을 뒤집으며 흘렀는데 불과 며칠이 못 되어 강물은 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 조용하고 맑은 것이 물의 본성 아닐까?지난 주 내내 온 나라를 충격과 비탄의 격류에 빠뜨렸던 김선일씨의 비극적인 죽음이 아직도 기억의 스크린에 생생하데 그의 절규와 외침이 멎은 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애도의 물결은 어느덧 혼탁함이 잦아든 강물과도 같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번 비극은 한때 바다 한 가운데 고립된 영국 시인 코울리지의 늙은 수부가 처했던 아이러니한 상황과도 유사한 일면이 있다. 사면이 바다로 에워싸였건만 정작 그가 필요로 하는 물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희망은 가장 가깝고도 요원했다. 그를 구출하는 것은 마치 거미들이 단결하여 자기들의 실로 성난 사자를 묶겠다는 것과 같은 것 아니었을까?
나무에게 뿌리가 있듯이 물에는 근원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도 계속되는 폭우로 인해 헝클어지고 어수선하지만 햇볕에 반짝이는 본래의 모습이 있을 터인데 그만 되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왜 계속해서 제방이 넘치고 무너지며, 만물을 깨끗하게 해야 할 물을 오히려 더욱 흐리게 만드는가? 무더운 여름을 더욱 무덥게 하는 붉은 깃발과 파업, 파병과 수도 이전을 놓고 발생하는 국론 분열, 주한미군 감축과 갈수록 수위가 올라가는 반미감정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계속 흐리고 혼탁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며, 드문드문 잠긴 둑이 조만간 무너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내 발 밑을 감도는 강물이 속삭이는 소리가 섬뜩하지 않은가? 눈물을 포함해 도처에 물이 많으니 우리 사회가 아직 엘리어트적인 메마른 '황무지'는 아닐 것이고, 비록 금강 하류의 '탁류'라 할지라도 불을 끄는 데는 유용할 것이니 우리의 혼탁함이 아주 절망적인 것만은 아닌데 배를 띄우는 물은 또한 배를 가라앉힐 수도 있으니 지느러미가 없는 인간으로서 어찌 두렵지 않을 것인가? 높고 낮은 것이 없는 사회가 반드시 좋은 사회는 아니다. 호수만 있고 강이 없으면 어쩌겠는가?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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