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사양 = 재벌 자제, 얼짱 외모, 순순 자체■ 변화사양 = 내심 상처, 인하 무인, 불량 청년
재벌2세에 외모는 ‘얼짱’ 수준이고 마음은 순수 그 자체. 게다가 언제라도 백마 타고 신데렐라를 구하러 갈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 시대 살아있는 ‘왕자’를 알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 ‘신데렐라’ 같은 동화책이나, ‘프렌치 키스’ 따위의 할리퀸 로맨스문고를 펼 필요도 없다. 그냥 리모콘을 누르면 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금 TV 드라마는 왕자님들과의 로맨틱 러브에 빠져 있다. 드라마 속 왕자님들은 가정주부와 이혼녀, 전문직 여성에서부터 무능력자까지, 캔디 스타일에서 청순가련형까지 테마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성들을 유혹하느라 바쁘다.
● 그들이 없으면 드라마도 없다
실제 예를 보자. SBS 아침드라마 ‘청혼’-이혼녀를 죽도록 사랑하는 재벌2세 총각 우경(이진우), MBC 일일드라마 ‘왕꽃 선녀님’-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숨긴 채 무병에 걸린 대학원생을 보살펴주는 버터 왕자 김무빈(김성택), KBS 월화드라마 ‘북경 내사랑’의 방황하는 도련님 민국(김재원)….
그리고 무엇보다 시청률 40%에 근접하며 연일 이야기 거리를 쏟아내고 있는 SBS ‘파리의 연인’의 두 왕자 기주(박신양)과 수혁(이동건), 아예 드라마 이름으로 황족 혈통을 자랑하는 MBC ‘황태자의 첫사랑’의 건희(차태현). 여기에 종영한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재민(조인성)과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종합병원 원장 집 아들 지훈(이현우), ‘불새’의 정민(에릭)까지.
● 불변의 법칙
재벌 또는 준 재벌급 집안의 자제라는 ‘기본 사양’을 제외한다면, ‘왕자님’이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누가 뭐래도 소머즈를 능가하는 청력이다. ‘파리의 연인’에서 기주는 태영(김정은)이 홍보실 상사가 “사보에 이름이 빠졌잖아요. 아주 미쳐요 미쳐”라며 구박할 때나, 라이벌인 윤아(오주은)에게 공격을 당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죄다 그 이야기를 듣는다.
뛰어난 청력을 바탕으로 왕자님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기주는 태영을 자기 회사 홍보실에 취직을 시켜주고 고문 변호사를 보내 태영의 작은 아버지를 경찰서에서 빼내 줄뿐 아니라, 종이붙이기 같은 소소한 일에도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지훈은 신영(명세빈)을 죽을 위기에서 구해내더니, 그녀 집에 가서 김치까지 담가준다. 양주 두세 병을 마셔도 끄덕없는 놀라운 주량과 ‘회장님’들을 놀라게 해 줄만한 경영능력도 겸비하고 있는 왕자들이니 신데렐라를 구원하는 건 식은 죽 먹기.
이런 왕자 곁에는 늘 그를 병적으로 사모하거나 쫓아다니는 여성이 있다. 그러나 ‘신데렐라’가 출현하는 것과 동시에 왕자는 자신들을 따라 다니는 여자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불새’의 정민은 천하의 바람둥이였지만 지은(이은주)을 만난 순간 회개하며 순정파로 돌변하고,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재민은 수정(하지원)을 향해 소년처럼 떨리는 풋사랑을 느낀다.
● 달라진 21세기 왕자들
이런 공식이 깨지지 않았음에도 왕자들의 모습은 예전과는 다르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차인표가 보여줬던 겸손하고 부드러운 왕자의 공식은 안하무인이고 돈으로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믿는 정재민(‘발리에서 생긴 일’)을 통해 철저하게 무너졌다.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건희는 부모를 속이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문제아. ‘파리의 연인’의 기주도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밥 먹는 행사를 놓고 “너무 가식적인 것 아니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얄미운 왕자님이다.
하지만 거만하고 방탕하며 계산적이기도 한 왕자들은 알고 보면 천하에 불쌍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불새’의 정민은 야망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와 술집 마담 출신인 계모(김부선) 아래서 불량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파리의 연인’의 기주는 어머니 없이 누나에게 의지해 자란 외로운 아이였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지훈은 사랑에 실패한 이혼남이고, ‘파리의 연인’의 기주도 비슷한 처지.
● 왜? '왕자' 대량생산시대인가
왜 TV 드라마들은 왜 일제히 붕어빵 같은 왕자님을 대량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일까? 임상심리학자이자 영화평론가인 심영섭씨는 “신분상승에 대한 별다른 통로가 없는 상황에서 막강한 자금력을 지닌 재벌가의 자식, 즉 현대판 왕자가 위기에 처한 여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통해 대리 만족감을 얻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또 “이같은 판타지가 TV 드라마에서 횡행하는 것은 박제화 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개성이 살아있는 새로운 ‘왕자’의 출현이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뚜렷한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대중들이야말로 TV가 쏟아내는 ‘왕자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왕자 중독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왕자 비틀기의 결정판인 영화 ‘슈렉2’가 박수와 환호를 얻고 있는 걸 보면 우리시대 대중들은 그저 TV 드라마 속 왕자들을 일회용 판타지로 적당히 소비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니까.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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