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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11>김주언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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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와 나]<11>김주언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

입력
2004.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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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3일. 나는 그날 저녁 한국일보 편집국에서 동료들이 보내던 박수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날 오전 법정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뒤 석방돼 초판 신문이 배달되던 때 편집국에 들어서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처음 보도지침을 접하던 순간의 격분, 보도지침의 실상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동료들과의 결의, 보도지침을 폭로하기까지 겪었던 마음고생에서부터 수감생활의 어려움, 수감 중 동료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6개월여 만에 편집국에 들어서는 순간 동료들의 박수소리는 보도지침 사건이 나 개인의 사건이 아닌 한국일보의 '승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보도지침 사건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사상 유례없이 1,000여명의 언론인을 해고하고 언론통폐합을 강행해 야만적이고 제도적인 언론통제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문공부 홍보조정실을 언론통제 창구로 단일화하고 매일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하달했다. 보도지침은 기사 내용뿐만 아니라 제목, 기사의 크기와 배치, 사진 게재 문제까지 상세하게 지시하는 등 언론사의 편집권을 정권이 완전히 장악했음을 확인시켜준 문건이었다. 1986년 9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행한 '말'지 특집호에는 1985년 10월 18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내가 폭로한 688건의 보도지침이 실려 그 실체를 처음으로 알렸다.

이후 1987년 9월 9일 명동성당 소강당에서 국내외 기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당시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송건호 의장이 보도지침의 내막을 폭로했다. 이젠 고인이 되신 송 의장의 회견은 보도지침에 의해 국내 언론에는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보도지침 사건은 나와 한국일보를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엮어 놓았다. 집 앞에서 경찰에 연행된 이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신문을 받을 때 동료 기자들의 석방요구 농성을 비롯해 물심양면으로 가족을 보살펴 주었던 박용배, 이성준 선배의 배려는 잊을 수 없다. 편집국 동료들은 내가 수감 중 첫 생일을 맞은 큰 딸의 돌잔치를 베풀어 줘 우리 가족을 감동시켰다. 엄마 손을 잡고 법정으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오던 큰 딸의 안쓰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또한 정부당국의 끊임없는 해고 압력에도 불구하고 '확정판결을 받을 때까지는 해고할 수 없다'고 버텼던 김창열 사장 등 당시 한국일보 경영진의 배려는 아직까지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 특히 1988년 국회 언론청문회에서 밝혀졌지만, 당시 장강재 회장은 편집국에 보도지침을 보관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의 야만적인 언론탄압 실상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 회장은 언론통제의 아픔을 편집국 기자들과 공유한 '참 언론인'이었다.

이밖에 재판과정에서 도와주었던 인권변호사들과 국내는 물론, 해외인사 및 인권단체들이 보낸 격려 편지 등은 6개월이라는 인고의 수감생활을 견디는 데 커다란 힘이 됐다. 끈질긴 법정투쟁 끝에 9년여 만인 1995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확정 판결을 받는 순간의 환희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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