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세대가 어렸을 적 품었던 스파이더맨에 대한 불만 하나. ‘손목에서 거미줄만 쏘아댈 줄 알았지, 왜 그리 허약할까. 얼어붙은 호수를 통째로 들었던 슈퍼맨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악당과 1대1로 싸울 경우 최소한 얻어터지지만 말아다오.’‘스파이더맨2’의 샘 레이미 감독이 이런 불만을 헤아린 탓일까. 아니면 2002년 1편의 흥행성공을 뛰어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이 훨씬 세졌다.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메뚜기처럼 도심을 뛰어다니기만 했던 1편 수준이 아니다. 대학생이 된 피터의 이야기를 다룬 2편에서 주먹 힘은 세졌고, 거미줄은 더욱 질겨졌다.
지구를 손에 넣으려는 반인반수의 괴물 닥터 옥터퍼스(알프레드 몰리나). 그가 가공할 힘으로 자동차를 날려보내지만, 자동차는 피터의 숙모(로즈마리 해리스)를 덮치기 직전에 멈춰버린다. 스파이더맨이 쏜 거미줄이 자동차를 순간적으로 옭아맨 것. 건물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옥터퍼스도 스파이더맨의 주먹 한 방에 휘청거리고,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 한없이 달려가는 전철도 스파이더맨이 용을 쓰니까, 결국 멈춰 선다.
파워만 증가한 게 아니다. 도심을 휘젓고 다니는 스파이더맨의 유연성은 훨씬 늘었다. 뻣뻣하기가 각목 수준이었던 1편의 ‘공중그네(거미줄) 갈아타기’ 솜씨는 정교한 컴퓨터그래픽 덕분에 아주 자연스럽고 볼만한 경지로 일취월장 했다. 일단 옥상에서 내려 뛴 다음, 여유 있게 거미줄을 쏘아대는 2중 점프동작은 예전의 스파이더맨 솜씨가 아니다.
그러면 업그레이드된 스파이더맨의 활약상이 이 영화의 전부일까. 이 점에서 샘 레이미 감독은 영리했다.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피터의 고민을 부각시킴으로써, 속편을 1편에 비해 보다 진지한 영화로 만들었다.
‘영웅의 삶을 살아야 하나, 아니면 소시민의 삶을 살아야 하나’ ‘결국 나는 누구인가’ 피터의 이같은 고민은 “괴물로 죽긴 싫다”는 옥터퍼스의 가슴 찡한 최후 진술과 함께, 치고 박고 싸우는 ‘슈퍼 히어로’ 영화의 진부한 관습을 뛰어넘었다.
집세도 밀리고, 가불도 늘어만 가는 스파이더맨. 여자친구 메리제인(커스틴 던스트)과의 약속시간에 늦지않기 위해 불의를 보고서도 등을 돌리는 스파이더맨. 숨도 쉬기 힘들 것 같은 스파이더맨 복장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은 것은 피터만이 아니다.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슈퍼맨이 돼야 하는 현대인 모두가 은근히 꿈꾸는 멋진 일탈의 순간이다. 12세관람가. 30일 미국과 동시개봉.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 정신분석학으로 본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2'는 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의 연인 메리 제인(커스틴 던스트)의 눈동자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해, 그녀의 눈동자를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끝난다.
2편은 1편(2002년)의 성장영화 틀을 벗어난 멜로영화의 꼴을 갖추고 있지만, 실은 성장영화의 연속이다. 초능력의 주인공 피터 파커는 애인 메리 제인의 시선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어린이다. '엄마, 내가 세상을 구했어'라는 뿌듯함이 피터 파커의 마음이라면, '그런 널 구해줄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게 메리 제인의 마음이다.
왜 피터 파커는 메리 제인의 어린아이인가. 피자를 늦게 배달해 가게에서 쫓겨나고, 학교에선 지각 대장에 숙제도 제때 안 내며 집세도 밀려있다. 메리에게는 수줍음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랑의 말을 기다리는 메리에게 말을 더듬다가 고작 입을 열어 '아직도 거기 사니?'라고 묻는 게 고작이다.
자신이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어 그런 게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그건 그의 미성숙을 가리는 구실에 불과하다. 스파이더맨이 자신의 초능력에 회의를 느끼는 것도 자신의 불성실에 상심한 메리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멜로임에도 연인 사이의 신체적 접촉이 거의 없고, 두 사람이 가까워지려는 찰나 늘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메리가 피터 파커의 엄마 역할까지 해내기 때문이다.
벽을 가득 메운 연극 포스터 속에서 연극의 주연 메리의 수 백 개 눈동자가 피터를 지켜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언제나 그를 지켜보고 있다. 유약해 보이지만 시련을 통해 성장하는 토비 맥과이어의 이미지가 그의 전작 '아이스 스톰' '사이더 하우스' '씨비스킷'의 연장 선상 위에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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